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의미 있기를 바란다. 살아서는 존재의 이유를 찾으려 부단히 애쓰고, 죽어서는 자신의 이름이 잊히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나 냉정히 따지면 한 사람은 77억 중 하나일 뿐. 인생은 짧고, 그 사람이 있든 없든 세상은 잘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 사람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인물들이 있다. 야코프 푸거의 일대기를 다룬 『자본가의 탄생』을 읽으며 문뜩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야코프 푸거는 1459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한스 푸거는 원래 농부였으나, 어느 날 시골 생활을 청산
마이클 샌델의 책을 볼 때마다 항상 그의 부지런함에 감탄한다. 수많은 사례들을 재료로 늘어놓으며 독자를 사고실험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쯤 등장하여 단숨에 가지를 휘어잡는 그 능수능란한 재주. 책장을 넘기다 보면 머리가 뒤죽박죽 엉키다가도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도 이러한 샌델의 전매특허가 여실히 드러난다. 암표 거래, 우선 탑승권, 코뿔소 사냥권, 대리 사과 서비스, 그리고 생명보험에 이르기까지. 만약 이중 단 하나만 이야기해야 한다면, 나는 대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종종 풀리지 않는 의문에 부딪힐 때가 있다. 강성해 보이던 나라가 순식간에 망한다거나, 선택의 기로에 선 인물들이 터무니없는 결정을 내린다거나,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기이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할 때,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러한 의문을 모두 세려면 끝이 없겠지만, 중국사를 놓고 보면 크게 두 장면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는 어째서 14년밖에 지속되지 못했을까? 그리고, 위·촉·오 중 가장 약소했던 촉나라는 왜 최강자 위나라에 반복해서 시비를 걸었을까?『역사 속
문장은 짧지만 행간의 호흡은 길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잔잔한데, 읽고 있노라면 가쁜 들숨과 깊은 날숨이 허파를 오간다. 마치 그때의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1900년대 초. 당시 미국은 온갖 모순과 대립, 갈등, 욕망의 용광로였다. 성별, 계급, 인종의 차이에 따라 개개인은 철저히 구획되었고, 이에 맞서는 목소리는 아직 정치적으로 조직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기회의 문은 열려 있었다. 자본주의가 팽창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선로가 놓였고, 온갖 진기한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이 변화에 저항하거나, 적응하거나, 주저앉았다.“
삶은 언제나 크고 작은 위기로 가득하다. 방심하면 찾아오는 건강의 위기, 피할 수 없는 관계의 위기, 그리고 이따금씩 급습하는 잔고의 위기.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역시 존재론적 위기다. 삶을 지속할 의미를 잃을 때 우리는 더없이 무력해지며, 극단적인 경우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도대체 우리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전해준다. 때는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생활이 지속되던 어느 날. 동료 수감자가 희한한 꿈을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제목만큼이나 문장들이 시종일관 유쾌하다는 것이다. 맛깔난 글 솜씨로 버무린 일상의 이야기들을 전하며,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장애인들의 마음속에는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는 어린왕자가 살고 있다고. 그 어린왕자들이 무사히 지구에 안착할 수 있도록 지구인들이 조금만, 조금만 더 호의적으로 지켜봐 달라고 말이다. 결국 핵심은 지구인들이 시선을 바꾸는 것이다. 장애는 병이 아니며 하나의 특성일 뿐이다. 다름이 틀린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다름 그 자체를 받아들이면 된다. 또한 장애인은 불행한 존재가 아니다. 장애인의
『실리콘밸리 스토리』는 그 제목처럼 실리콘밸리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휼렛과 패커드가 어쩌다 차고에서 창업을 하게 되었는지, 릴런드 스탠퍼드 주니어의 죽음이 어떻게 최고의 대학을 꽃피웠는지, 스타트업들은 어떤 방식으로 끊임없는 혁신을 이루어내는지 등등, 각 장면 장면이 마치 동화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진정 ‘실리콘밸리 스토리’는 한 편의 동화였을까?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서부의 자유로운 공기 아래 인재, 기술, 자본이 결합해 자생적으로 탄생한 결과였을까? 나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책장을 넘기는
20세기말에 태어나 21세기에서 대부분의 인생을 보낸 나에게, 산업화와 민주화는 모두 희미한 과거다. 10대가 되어 조금씩 세상을 알아갈 무렵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이후 박근혜 정부, 촛불시위를 지나 문재인 정부가 등장했다. 실업률은 낮았던 적이 별로 없고, 경제성장률은 오랜 기간 정체되었다. ‘헬조선’과 ‘탈조선’이 사람들의 혀끝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의 언어로 정착했다. 이것이 내가 관찰하고 경험한 대한민국이다.물론 역사를 공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광대한 우주 한 귀퉁이의 티끌 같은 행성이다. 그리고 그 지구에서도 인간은 오랜 시간 그저 하나의 보잘것없는 종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떻게 인류는 오늘날 만물의 영장으로 등극할 수 있었을까? 과학자들은 그 원인이 사회성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지능이 탄생하려면 우선 개체들이 사회를 이뤄야 하고, 근거지를 만들어야 한다. 정해진 장소에서 번식, 방어, 사냥 따위를 하며 이들은 서로 희생하고 협력하고 갈등하고 기만하게 된다. 이렇듯 점차 증가하는 사회적 압력에 개체들이 적응해감에 따라 사회성이 탄생하는 것이다.고
2차 북미정상회담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과연 북한의 비핵화는 가능할까? 북미수교가 이루어질까? 통일은 정말 가까운 미래일까? 20~30대 지인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 대부분 회의적인 반응이 돌아온다. 북한 정권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부터 지금 당장 영구분단을 선언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까지. ‘민족’의 안경을 벗어젖힌 젊은 세대는 이미 한반도 문제가 고차방정식이라는 사실을 뼛속들이 체득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 정권에서 번갈아 청소년기를 보내며,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고차방정식을 맞닥뜨렸을
흔히 파시즘이라고 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떠올린다. 무소불위의 권력, 제국주의를 향한 열망, 의회 민주주의 거부, 과도한 국수주의, 그리고 반유대주의. 조금 더 레이더망을 넓히면 독일의 나치, 쇼와 초기의 일본 등이 시선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파시즘은 완전히 사그라졌을까? 몇몇 연구자들의 주장대로 1919~1939년의 특수한 현상일 뿐일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정체성 정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그 전에, 도대체 파시즘이란 무엇일까?잠시 시계를 1942년으로 돌려보자. 당시 이탈리아에는 모든
지난 2015년의 어느 여름날. 18살이었던 나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국제선 탑승구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곧 생애 최초의 배낭여행이 시작될 텐데, 설렘보다는 암담함이 눈앞을 가렸다.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중간에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지? 가뜩이나 소심한 성격이었던 나는 비행기 표를 끊은 것을 자책하기 시작했고, 기내서도 안절부절못하며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했다.그러나 유럽에 도착한 지 1달이 지났을 무렵,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이전과는 꽤나 다른 사람으로 변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말을 적게 하고 조심조심
『지방도시 살생부』는 제목부터가 꽤나 섬뜩하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언제나 중앙이 문제 아니었던가? 과도한 수도권 편중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목놓아 부르짖었다. 이에 화답하여 새로운 정부는 재임기간 동안 5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4대강 사업의 두 배 가까운 돈으로 500곳의 쇠퇴지역을 살리겠다는 것이다. 자, 그럼 모두 만족한 것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살생부라니?저자는 책의 첫머리부터 ‘골고루 나눠 갖지 말자!’고 선언한다. 이유는 바로 그것이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지속가능하지
조금 부끄러운 사실을 하나 고백하자면, 나도 청소년 시절 『환단고기』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우리 민족이 유라시아 대부분을 점령하던 때가 있었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항상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고문당하고, 심지어 나라까지 빼앗긴 근현대사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찬란한 역사를 왜곡시킨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이 얼마나 밉던지. 하루빨리 무너진 역사를 바로 세우고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 되었다. 그렇게 가슴 끓이기를 1년 여. 어느 날 불현듯 히틀러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
2018년 5월 10일,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가 92세의 나이로 말레이시아 총리에 취임했다. 가만, 마하티르? 뭔가 익숙한 이름 같지 않은가? 맞다. 1981년부터 2003년까지, 무려 22년간 말레이시아를 주름잡던 바로 그 마하티르다. 그의 복귀가 확정되자 수많은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그 환호성이 단지 마하티르 개인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말레이시아 시민들은 1957년 영국에서 독립한 이래 이루어진 첫 정권교체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주체가 연로한 전임 총리라는 점이 외국인인 나에게는 조
지구 더하기 나와 지구 빼기 나의 차잇값은 얼마일지 종종 생각해본다. 0.1? 0.01? 아니, 소수점 100자리까지 가야 겨우 근삿값이 나올 것 같다. 낳아주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지구 전체로 본다면 나 한 사람이 살거나 죽는다고 해서 큰 차이는 없다. 셀 수 없는 생명체 가운데 하나, 먼지 같은 존재이니 말이다. 그러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면, 심지어 지구보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우주. 그 광대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가운데 나는 어떤 존재일까? 지구마저도 티끌로 만드는 압도적인 스케일 속에서,
역사의 웅대한 물결 속에서 한 개인이 얼마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과연 요시다 쇼인이 없었어도 메이지 유신은 가능했을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1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스티브 잡스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까? 과거를 음미하다 보면 끊임없이 이런 질문들이 머리에 스친다. 그러나 나는 이제껏 한 인물에 대해서는 이러한 생각을 유보해 왔다. 20세기를 통틀어 인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남자,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히틀러의 등장이 우연인가 필연인가 따져 묻는 것은
나에게 처음 철학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은 언제나 두 가지를 강조하시곤 했다. 가장 먼저는 시선이다. 시선의 높이가 시대정신을 만들어내고, 그 시대정신이 곧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다음은 윤리다. 윤리적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배제하라고 주문하셨다. 구체적 현장이 펼쳐지고 난 뒤 윤리가 뒤따르므로 거기에 갇히면 탁월한 시선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세계를 경영했던 제국들은 모두 육체적이고 울퉁불퉁한 현장의 소리를 사유했다는 것이다. 나는 수업을 들으며 항상 궁금했다. 그 탁월함은 오로지 개인들에게 달린 것
중국. 이 두 글자를 볼 때면 왠지 모를 막막함이 밀려온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각기 다른 배경을 지닌 14억 인민, 베일에 싸인 권력구조, 그리고 복잡다단한 정책결정과정까지. 꼬불꼬불한 초행길을 아무 이정표 없이 걷는 느낌이 이럴까. 언론도 미로에 빠졌는지 심도 있는 분석을 찾기가 어렵다. 한창 한중관계가 좋을 때는 수출 전망을 내놓으며 열을 올리지만, 사드 보복을 얻어맞고 경제가 휘청거리면 돌연 천하의 못 믿을 국가로 돌변한다. 양국의 물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심리적 거리는 미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먼 듯하다
철학은 나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키케로를 읽는다고, 노자를 공부한다고 과연 삶이 달라질까? 이 질문을 두고 한참을 괴로워했다. 애초에 공부를 시작했던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아닌 삶 속에 무언가 변화가 있으리라는 믿음. 그렇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다.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는 것은 나약함의 방증이다. 그러나 핑계를 대자면, 철학을 이야기하는 이들 중 본받을 사람을 찾지 못했다. 허공을 떠다니는 말들의 향연. 그리고 나. 해가 뜨고 또 해가 지는데 나는 그대로였다.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훌륭한 이야기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