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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떻게 동아시아의 승자가 됐나
  • 임하영
  • 승인 2019.03.1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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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말에 태어나 21세기에서 대부분의 인생을 보낸 나에게, 산업화와 민주화는 모두 희미한 과거다. 10대가 되어 조금씩 세상을 알아갈 무렵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이후 박근혜 정부, 촛불시위를 지나 문재인 정부가 등장했다. 실업률은 낮았던 적이 별로 없고, 경제성장률은 오랜 기간 정체되었다. ‘헬조선’과 ‘탈조선’이 사람들의 혀끝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의 언어로 정착했다. 이것이 내가 관찰하고 경험한 대한민국이다.

물론 역사를 공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했는지, 끊임없이 보고 들었다. 독립운동사 역시 마주할 기회가 많았다. 순국선열들의 헌신을 헛되이 하지 않겠노라고 여러 번 굳게 다짐했다. 그렇다면 산업화는? 그것은 국민 전체가 노력해서 얻은 당연한 결과겠지. 특정 리더십의 영향은 미미했을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이러한 생각은 경제사와 경제정책을 공부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산업기반을 갖추기 위한 지난한 노력과 성장을 저해하는 크고 작은 장애물, 그리고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온갖 변수들까지.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한국의 발전상이 필연이 아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기는커녕 전 세계를 통틀어 매우 예외적인 사례였던 것이다. 이는 몇몇 동남아시아 국가들만 보아도 분명해진다. 수십 년 전 한국과 비슷하거나 더 나은 상황에 있었던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현재 1인당 GDP에서 많게는 10배가량 격차가 벌어졌다. 불과 2~30년 만에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아시아의 힘』의 저자 조 스터드웰은 세 가지 요인을 꼽는다. 첫 번째는 바로 토지정책이다. 개발 초기 단계 국가들의 경우 대부분 인구의 75%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토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지주들은 갈수록 비싼 값을 받고 땅을 빌려주기 시작한다. 임대인들은 높은 지대와 비싼 이자를 감당하느라 관개를 정비하거나 비료를 사는 등의 투자를 할 수 없게 되고, 지주들 역시 소출을 늘리기보다는 고리대금을 통한 돈벌이에 집중한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사례가 여기에 해당된다. 반면 한국의 경우 1950년 6•25전쟁 발발 직전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이를 통해 안정된 고용을 창출하고, 도시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식품을 공급하고, 성장의 기반이 되는 잉여생산물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제조업이다. 제조업이 중요한 이유는 서비스업과 달리 미숙련 노동자들도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고, 그렇게 생산된 공산품이 전 세계로 쉽게 교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책수립자들은 제조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보호와 보조라는 2가지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가의 지원이 계속되면 기업인들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기술 발전에 매진하는 대신 지대 추구에 집중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국가와 기업의 이해관계를 강제로 일치시킬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수출 규율’이다. 한국의 경우 경제기획원을 중심으로 대기업들의 수출을 강제하고 경쟁시킨 끝에 국제경쟁력을 갖춘 산업 육성에 성공했다. 반면 말레이시아의 독점과 특혜에 기반한 산업정책은 기업들이 자국의 지대만 추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정책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는 금융을 강력히 통제해야 한다. 사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소비자 대출이나 부동산 투자에 집중하는 편이 단기적으로 훨씬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 이러한 금융계를 짧은 사슬로 옭아매고 개발에 기여하도록 채찍질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금융기관들을 일제히 재국유화했으며, 수출을 하는 기업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IMF에서 거듭 금융 자유화를 요구했지만 1990년대까지 모두 거부했다. 반면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재정도 매우 건전하고 저축률도 높았지만, 너무 일찍 금융이 자유화되는 바람에 자본이 단기적 수익을 쫓아 비생산적인 부문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결국 경제성장의 꿈은 서서히 사그라지고 말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짐작보다 잘 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만 다른 선택을 했어도 전혀 상이한 결과가 펼쳐졌을 테니 말이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룬 몇 안 되는 국가다. 산업화 세대는 전쟁과 가난을 딛고 일어섰고, 민주화 세대는 독재와 억압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 두 세대의 문법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 새로운 세대로서 우리는 먼저 이 두 변곡점을 치우침 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무조건 긍정하지도 무조건 부정하지도 않으며,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며. 그렇게 정교하게 사유할 때라야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수 있지 않을까.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는 현재를 힘차게 돌파하며 말이다. 

 

<필자 소개>

1998년 끝자락에 태어났다. 지금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에 관심이 많다. <소년여행자>,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을 지었다.

임하영  e-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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