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광대한 우주 한 귀퉁이의 티끌 같은 행성이다. 그리고 그 지구에서도 인간은 오랜 시간 그저 하나의 보잘것없는 종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떻게 인류는 오늘날 만물의 영장으로 등극할 수 있었을까? 과학자들은 그 원인이 사회성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지능이 탄생하려면 우선 개체들이 사회를 이뤄야 하고, 근거지를 만들어야 한다. 정해진 장소에서 번식, 방어, 사냥 따위를 하며 이들은 서로 희생하고 협력하고 갈등하고 기만하게 된다. 이렇듯 점차 증가하는 사회적 압력에 개체들이 적응해감에 따라 사회성이 탄생하는 것이다.

고도의 사회적 진화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이제껏 두 이론이 논쟁을 벌여왔다. 첫째는 윌리엄 해밀턴에서 리처드 도킨스로 이어지는 포괄적합도 이론이다. 이들은 ‘혈연 선택(kin selection)’을 이야기하며 개인이 방계 친족(자식 이외의 친족들)을 선호하면서 집단 내부에 이타주의가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이타주의를 통해 잃는 손해보다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유전자의 수를 통해 얻는 이익이 더 컸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에드워드 윌슨 등은 자연 선택이 두 수준에서 작동한다며 다수준 선택 이론을 제시했다. 집단 내 구성원들 사이의 경쟁과 협력을 토대로 한 개체 선택(individual selection)과 집단 사이의 경쟁과 협력에서 비롯되는 집단 선택(group selection)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개체 수준에서는 이기적 개체가 유리하지만, 집단 수준에서는 이타주의자들의 집단이 살아남는다. 즉 두 수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모순이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전적 측면을 잠시 뒤로 제쳐두면 어떨까? 컴퓨터 게임을 통해 협력의 메커니즘을 밝혀낼 수 있다면? 미시건 대학 정치학과 교수인 로버트 액설로드가 바로 이런 방식을 고안했다. 게임은 죄수의 딜레마에 기반한다. A 경기자와 B 경기자는 각자 협력과 배반을 선택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협력을 택하면 두 사람은 ‘상호협력에 대한 보상(R)’으로 3점을 받는다. 한 사람이 협력을 하고 다른 사람이 배반을 할 경우 배반을 한 사람은 ‘배반의 유혹(T)’으로 5점을 받고 협력을 한 사람은 ‘머저리의 빈손(S)’으로 0점을 받는다. 두 사람 모두 배반을 하면 ‘상호배반에 대한 처벌(P)’로 각각 1점을 얻는다. 이 상황에서는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하던 배반을 하는 것이 언제나 유리한 전략이다.

그러나 게임이 여러 번 반복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액설로드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두 번의 컴퓨터 프로그램 대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되는 전략을 펼쳤다. 우선 팃포탯(TitforTat)은 처음에는 무조건 협력을 선택하고, 이후에는 상대의 수에 따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했다. 올디(AllD)는 항상 배반을 택했고, 테스터(Tester)는 일단 배반으로 시작한 뒤 상대의 반응에 따라 팃포탯과 배반 전략을 번갈아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다우닝(Downing)은 처음 두 게임을 배반하고, 이후에는 상대의 반응 패턴을 정교한 확률로 예측한 뒤 자신의 전략을 선택했다.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합리적 인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누가 우승을 차지했을까?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바로 팃포탯이었다. 일단 팃포탯은 절대로 먼저 배반하지 않는 신사적인 전략을 펼친다. 그러나 배반을 당할 경우 바로 응징을 가하고, 원한 없이 단 한 번만 보복함으로써 관대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팃포탯의 전략은 쉽게 예측 가능하여 상대의 장기적인 협력을 이끌어낸다.

이 같은 결과는 당위를 배제한 지극히 개연적인 내용이지만,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의 주장을 반박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홉스는 강력한 중앙 권위체가 없으면 올디 같은 인간들이 득세하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협력의 자세를 견지하되 적당한 보복을 가하는 팃포탯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팃포탯이 결국 상대가 협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상대의 본성이 선하든 악하든 그것은 의미가 없다. 팃포탯과의 조우가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상대는 협력이 이득이라는 것을 깨닫고 협력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근원을 묻고 따지는 철학은 어쩌면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물론 실제 인간의 삶에는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하여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실험이 개인의 삶, 그리고 사회의 향방에 충분히 유의미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낮은 신뢰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 사회라면 말이다. 

 

<필자 소개>

1998년 끝자락에 태어났다. 지금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에 관심이 많다. <소년여행자>,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을 지었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