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나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키케로를 읽는다고, 노자를 공부한다고 과연 삶이 달라질까? 이 질문을 두고 한참을 괴로워했다. 애초에 공부를 시작했던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아닌 삶 속에 무언가 변화가 있으리라는 믿음. 그렇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다.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는 것은 나약함의 방증이다. 그러나 핑계를 대자면, 철학을 이야기하는 이들 중 본받을 사람을 찾지 못했다. 허공을 떠다니는 말들의 향연. 그리고 나. 해가 뜨고 또 해가 지는데 나는 그대로였다.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훌륭한 이야기를 많이 안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결국 삶과 맞닿지 않은 앎은 무의미한 것이다.

얼마 전 『철학자와 하녀』를 읽었다. 이야기는 한 흥미로운 일화로부터 시작된다. 인류 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탈레스가 어느 날 별을 보며 걷다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하녀는 깔깔대며 비웃는다. “탈레스는 하늘의 것을 보는 데는 열심이면서 발치 앞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현실의 세계와 동떨어진 철학자들을 재치 있게 조롱한 것이다. 당연히 철학자들이 대대로 싫어할 수밖에. 특히 소크라테스는 이 하녀를 철학에 무지하면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무지한 대중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2,500년 뒤, 또 다른 별빛을 본 사람이 있었다.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의 한 학생이 하룻밤 엠티를 하던 중 별을 올려다본 것이다. “지난 10월 모꼬지 때 TV에서나 보았던, 그렇게도 부러웠던, 모닥불을 피워놓고 얘기하는 것을 했을 때 너무 좋았어요. … 그때 하늘을 보신 분이 많으리라 생각해요. 모든 별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서 비추어주는 것 같았어요. 정말 눈물이 나와서 울 뻔했어요. 무언지 모를 눈물이 나오려고 하더군요.”

별빛은 그 학생 안에 작은 불꽃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너 나가서 어떻게 살래?’ 이랬어요. 그런데 자신감이 있었어요. ‘나, 나가서 살고 싶어. 한번 겪어 보고 싶어.’ 그런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그래서 야학 다니면서 방도 얻고 자동차 면허증도 따고 독립도 했죠.” 수십 년간 집이나 시설, 그리고 작업장에만 갇혀 있던 장애인이 모닥불을 피우고 별빛을 보던 순간. 그 찰나의 일깨움, 깨달음이 그녀의 삶을 완전히 뒤바꾼 것이다.

철학은 구체적 견해가 아닌 생각 자체의 일깨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깨달음은 천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그곳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극복의 가능성도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은 인간 안에 자기 극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렇기에 지옥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그곳을 생의 발판 삼아 끊임없이 삶을 꾸려나간다.

의지를 가지면 생각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면 삶이 바뀐다. 그리고 그 삶은 필시 기존의 질서와 불화한다. 소크라테스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스피노자는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으며, 니체는 떠돌이로 생을 마감했다.

다시금 나에게 묻는다. 지금 서 있는 곳, 여기는 천국인가 지옥인가? 오늘 하루, 나 자신을 극복할 의지가 있는가? 입으로 말하지 않고 손으로 행할 수 있는가? 삶을 던져 철학할 수 있는가?

하녀의 눈으로 밤하늘의 찬란한 별빛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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