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웅대한 물결 속에서 한 개인이 얼마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과연 요시다 쇼인이 없었어도 메이지 유신은 가능했을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1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스티브 잡스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까? 과거를 음미하다 보면 끊임없이 이런 질문들이 머리에 스친다. 그러나 나는 이제껏 한 인물에 대해서는 이러한 생각을 유보해 왔다. 20세기를 통틀어 인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남자,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히틀러의 등장이 우연인가 필연인가 따져 묻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만약 우연이라면 비슷한 일이 언제든 돌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필연이라 해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단 말인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에 대한 절망이 깊어진다. 물론 무 자르듯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문제다. 역사에는 우리가 고려할 수 없는 수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니 말이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길잡이를 찾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 길잡이가 바로 제바스티안 하프너였다. 그는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스마르크의 최고 승리는 자신의 실패의 뿌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도이치 제국의 건설은 이미 그 붕괴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었다.” 시작할 때부터 멸망할 징조였다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862년으로 시계추를 되돌려야 한다.

1862년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왕국의 총리가 된 해다. 그는 자신의 첫 연설에서 앞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문장을 내놓았다. “이 시대의 거대한 문제들은 연설과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를 통해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그리고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까지. 3번의 전쟁을 마친 1871년, 드디어 베르사유 궁전에서 도이치 제국이 선포되었다.

제국의 총리가 된 비스마르크는 더 이상의 팽창을 자제하는 ‘작은 도이치’ 정책을 추진했다.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도이치 사람들의 합병 소망을 지속적으로 거부했고, 해외 식민지 개척에도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이웃한 국가들이 연합하려는 징조가 보이면 재빨리 그를 저지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유럽의 총검이 대륙의 중심부를 겨누고 있다는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도이치 제국의 평화의 길을 걷는 듯 보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정책에는 모순적인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었다. 우선 1870~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그가 그토록 배격했던 민족주의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었는데, 드디어 복수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도이치 제국이 몇 배나 우세했으니 민족적 자부심이 활활 타올랐다. 비스마르크의 ‘작은 도이치’가 내실을 다져갈수록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고, 1890년 그가 퇴임하자 아무도 ‘작은 도이치’를 원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혹은 그 너머를 아우르는 ‘큰 도이치’였다.

1888년 즉위한 빌헬름 2세는 이런 기대에 부응해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펼쳤다. 당연하게도 주변국들이 반발하여 비스마르크가 두려워하던 ‘연합의 악몽’이 현실화되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독일에 맞서 힘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대륙을 감돌던 미묘한 긴장은 결국 1914년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도이치 제국에 유리한 것처럼 보였던 전세는 순식간에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참전을 결정했고, 영국의 해상봉쇄로 도이치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패전의 분위기가 짙어지는 가운데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혁명을 일으켜 황제가 도주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혼란 가운데 서둘러 급조된 지도부가 부랴부랴 베르사유에서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대부분의 도이치 국민들은 이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는 전쟁에 이기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동안에도 언제나 합의평화만 바라던 약삭빠른 놈들이 정권을 잡더니 전쟁을 포기해버렸다. 그러자 혁명이 일어났고, 이어서 우리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정서를 뼛속 깊이 간직한 이들 가운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한 실패한 예술가가 있었다. 그는 자원병으로 도이치 군대에 입대했으나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망연자실한 패배의 순간, 그는 정치가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 이름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1919년 패전 직후부터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까지의 시기를 바이마르 공화국이라고 한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무장해제와 전쟁배상금이라는 짐을 짊어지긴 했지만, 사실 도이칠란트의 지정학적 위치는 전쟁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이전까지 도이치 제국을 포위하던 4강, 즉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중 절반이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경제였다. 전쟁 막바지에 달러 대비 마르크는 1:10의 환율을 유지했다. 그러나 1922년에는 1달러가 2만 마르크가 넘었다. 도이치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그저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장려하기까지 했다. 스스로 지불 불능이 되어 전쟁배상금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 계층과 노동자들의 돈이 휴지조각이 되며 정권에 위기가 닥쳤다.

사태를 방치할 수 없었던 영국과 미국의 압박으로 1923년 도이치 정부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1924년 런던 협정과 1925년 로카르노 조약을 통해 배상금과 국경선 규칙이 새롭게 정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부터 미국이 도이칠란트에 전쟁배상금의 2.5배에 이르는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는 점이다. 즉 도이칠란트는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고, 그 자금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 대출을 갚고, 그러면 또 미국은 도이칠란트에 엄청난 금액을 빌려주는 식이었다. 도이치 경제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1929년 미국에서 발생한 대공황이었다. 미국의 지원이 끊기자 도이치 경제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머지 배상금마저 털어낼 절호의 기회를 찾은 정부는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디플레이션 정책을 펼쳤다. 도이칠란트는 점점 가난해졌고, 전쟁배상금을 갚을 수 없게 되었다. 사회는 완전히 파국을 맞았다. 빈털터리가 된 도이치 사람들은 민족주의로 무장한 구원투수 히틀러에게 열광할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자, 이쯤에서 다시금 처음의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히틀러의 등장은 필연이었는가? 저자는 말한다. “히틀러가 없었어도 1933넌 이후에 아마도 일종의 총통 국가가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가 없었어도 아마 두 번째 세계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다만 수백만 유대인 학살만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비스마르크가 뿌린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히틀러라는 열매를 맺은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독일은 20세기와는 전혀 다르다. 국기를 내거는 것마저 금기시되는 이 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나치 부역자를 색출하여 법정에 세우고 있다. 경제는 건실한 산업기반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며, 독일의 리더십이 부재한 유럽연합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현재 독일에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꾸준히 유입되고 있는데, 그중 상당수는 중동에서 온 난민들이다. 이들을 향한 포용적 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고, 정체성이 다른 집단끼리 이전투구가 벌어질 조짐이 보인다.

언젠가는 독일 국민들이 작은 도이치’를 넘어 ‘큰 도이치’를 갈구할 수도 있다. 나날이 성장하는 포퓰리즘이 다시금 민족주의의 거대한 물결을 일으킬 수도 있다. 세계 경제에 대공황이 찾아올 수도 있다. 과연 22세기의 독일은 어떤 모습일까? 역사가 반복되리라는 염려는 기우에 불과할까? 300명의 난민들을 맞아 온 나라가 떠들썩한 대한민국부터 먼저 걱정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필자 소개>

1998년 끝자락에 태어났다. 지금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에 관심이 많다. <소년여행자>,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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