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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가 던진 역설
  • 임하영
  • 승인 2019.04.0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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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스토리』는 그 제목처럼 실리콘밸리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휼렛과 패커드가 어쩌다 차고에서 창업을 하게 되었는지, 릴런드 스탠퍼드 주니어의 죽음이 어떻게 최고의 대학을 꽃피웠는지, 스타트업들은 어떤 방식으로 끊임없는 혁신을 이루어내는지 등등, 각 장면 장면이 마치 동화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진정 ‘실리콘밸리 스토리’는 한 편의 동화였을까?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서부의 자유로운 공기 아래 인재, 기술, 자본이 결합해 자생적으로 탄생한 결과였을까? 나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책장을 넘기는 내내 정치와 사회의 역할에 대해 곰곰이 고민해볼 수밖에 없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는 페어차일드 반도체다. 이야기는 트랜지스터를 최초로 발명한 윌리엄 쇼클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쇼클리는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한 걸출한 연구자였다. 그는 1955년 벨 연구소에 사표를 내고 캘리포니아에 회사를 창업하는데, 여태까지 쌓은 명성 덕택에 최고의 인재들을 채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단적인 경영으로 직원들과 갈등을 빚고, 결국 1957년 9월 회사의 핵심 인재 8명이 사표를 낸다. 회사를 떠난 ‘8인의 배신자’는 창업을 원했지만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는데, 그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사람이 바로 셔먼 페어차일드였다. 그렇게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탄생한다.

그렇다면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어떻게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1957년의 스푸트니크호 발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소련에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8년 서둘러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하고, 그때부터 우주개발경쟁이 본격화된다. 이에 맞춰 미 공군은 IBM에게 초음속 B-70 폭격기에 장착할 항법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를 맡겼다. 그리고 IBM은 거기에 부착할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당시 설립 3개월 차이던 페어차일드 반도체에 주문했다. IBM이 요구한 스펙을 맞추기 위해 5개월 동안 밤을 새며 연구한 끝에, 1957년 7월 페어차일드는 실리콘 트랜지스터 100개를 납품하는데 성공했다. 게르마늄 트랜지스터보다 30배 빠른 획기적인 상품이었다. 이후 페어차일드 출신들은 인텔, AMD를 포함한 20~30여개 회사들을 창업하며 승승장구한다. 만약 냉전이 없었다면 실리콘밸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을까?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다.

두 번째 사례는 바로 승객과 차량을 이어주는 서비스인 우버다. 흔히 실리콘밸리라고 하면 규제가 약한 비즈니스의 천국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우버의 시작은 결코 쉽지 않았다. 2010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범 서비스를 시작한 우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 교통국과 주 당국으로부터 영업 중지 명령을 받았다.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막대한 벌금을 물어야 했지만, 경영진은 서비스를 중단하지 않았다. 대신 우버는 대중을 상대로 직접 문자를 보내고 우편을 발송하며 우호적인 여론을 조직했다. 다수의 목소리가 규합되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자 결국 규제는 완화되었다.

세 번째로 인상 깊었던 사례는 바로 와이 콤비네이터가 진행하고 있는 기본소득 실험이었다. 저소득층이 많은 오클랜드 지역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매달 1500달러씩 지원하는 프로젝트로, 2019년 현재 막 파일럿이 진행 중인 상황이다. 그런데 창업 투자 인큐베이터가 어째서 이런 실험을 벌이는 것일까? 바로 기술 발전으로 인간의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로봇과 자동화로 생산성이 아무리 늘어도, 소비자가 감소하면 시장경제가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기업이 아무리 이윤을 추구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에 이르면 자신이 뿌리를 둔 사회라는 거대한 생태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유능한 정치는 크게 2가지 역할을 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포용적 제도를 만들어 경쟁과 혁신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대신 독점이나 지대추구 행위들은 과감히 규제해야 한다. 그러나 창조적 파괴 뒤에는 언제나 갈등이 따른다. 이때 손실에 민감한 조직된 소수가 승리한다면 사회는 진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익에 둔감한 분산된 다수의 목소리를 규합하는 동시에 뒤처진 소수에게 사회안전망을 제공하며 갈등을 조정해나가야 한다.

앞으로 일자리가 증가할지 감소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새로운 혁신이 일어난다면 1명은 실직할 수 있어도 나머지 9명의 가처분소득은 늘어난다. 그렇다면 새로운 소비와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늘어난 가처분소득이 다시 거대 IT기업에 소비된다면? 구글과 아마존이 막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지구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책임진다면? 그때는 다시 정치의 역할이 정말로 중요해지지 않을까?

 

<필자 소개>

1998년 끝자락에 태어났다. 지금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에 관심이 많다. <소년여행자>,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을 지었다.

임하영  e-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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