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처음 철학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은 언제나 두 가지를 강조하시곤 했다. 가장 먼저는 시선이다. 시선의 높이가 시대정신을 만들어내고, 그 시대정신이 곧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다음은 윤리다. 윤리적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배제하라고 주문하셨다. 구체적 현장이 펼쳐지고 난 뒤 윤리가 뒤따르므로 거기에 갇히면 탁월한 시선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세계를 경영했던 제국들은 모두 육체적이고 울퉁불퉁한 현장의 소리를 사유했다는 것이다. 나는 수업을 들으며 항상 궁금했다. 그 탁월함은 오로지 개인들에게 달린 것일까? 영토가 거대했던 제국은 구성원들이 더 높은 시선을 가졌기에 그랬을까? 모든 제국은 언제나 쇠퇴하기 마련인데, 그건 그 시선의 높이가 추락했기 때문일까? 무언가 보편적 공식을 도출할 수 없을까 생각해 보다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제국의 흥망성쇠를 결정짓는 복잡한 상호작용을 내 좁은 사고의 폭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러던 어느 날, 놀랍게도 제국의 탄생과 몰락을 과학적 원리로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을 만났다. 바로 생물학자 피터 터친이 쓴 『제국의 탄생』이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꼽는다면 바로 ‘아사비야(asabiya)’다. 14세기 사상가 이븐 할둔이 주창한 이 개념은 ‘사회집단이 집단적으로 일치된 행동을 할 수 있는 역량’을 말한다. 즉 서로 끈끈이 협력하는 집단만이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집단이 높은 수준의 아사비야를 갖게 되는가? 바로 변경(boundary)에 자리한 집단이다. 민족과 민족 사이의 국경이 아닌, 문명과 문명이 마주하는 초민족 공동체(metaethnic community)의 변경 말이다. 숨 막히는 경쟁이 벌어지는 그곳에서, 통합되지 않은 집단은 와해되어 사라지고 단합된 집단은 번성하며 세력이 강해진다. 이 과정을 통해 제국의 토대가 되는 제국 민족(imperial nation)이 탄생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모스크바 공국은 타타르족과의 변경을 토대로 성장했으며, 청교도들은 인디언과의 전쟁을 통해 결속력을 키웠다. 로마제국은 갈리아 족의 침략을 극복하며 형성되었고, 로마가 멸망한 뒤 그 변경에서 새로운 제국들이 탄생했다.

제국은 점점 세력을 키우며 번영을 이루고, 그 결과 인구가 꾸준히 증가한다. 인구가 늘어나자 임금은 하락하고 지대는 상승하여 평민들의 1인당 소득이 감소한다. 땅을 소유한 상류층 역시 처음에는 막대한 이익을 누리지만 점점 그 수가 증가하며 각자의 파이가 줄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빈곤해지며 세수가 바닥나고, 국가 재정이 붕괴되어 군대와 경찰을 통제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엘리트층의 갈등이 고조되어 내전이 일어나고, 가난한 사람들 역시 불만을 쏟아낸다. 이 아슬아슬한 상황 가운데 기근과 전쟁, 전염병이 발생하며 제국은 위기를 맞는다. 엘리트층은 분열을 거듭하며 더욱 격렬히 싸우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더러는 목숨을 잃고 더러는 평민층으로 격하되며 자연스럽게 구성원이 줄어든다. 결국 경쟁이 잦아들며 질서가 회복된다. 2, 3세기 단위로 일어난다 하여 이를 ‘세기적 순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기나긴 분열의 과정 속에서도 중간중간 평화가 찾아오는 시기가 있다. 삶이 불안정하면 사람들은 진절머리를 내기 때문에, 내전은 한 세대를 건너뛰는 경향이 있다. 자식들은 아버지 세대의 혼란을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두려움을 모르는 손주 세대가 등장하면 싸움은 다시 격화된다. 40~60년 단위로 일어나는 이 순환을 ‘아버지와 아들의 순환’이라고 한다.

세기적 순환과 아버지와 아들의 순환을 반복적으로 겪으며 제국의 아사비야는 지속적으로 하락한다. 여기에 더해 영토 확장이라는 요인도 작용한다. 제국은 역량이 늘어날수록 밖으로 팽창하는데, 그 결과 변경이 중심에서 밀려나 처음의 높은 아사비야를 만들었던 힘이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성공이 실패를 낳고, 실패는 성공을 낳고, 다시 성공은 실패를 낳는다. 제국은 타살이 아닌 자살로 죽는다.

그렇다면 이 같은 모델을 현대국가들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중국과 미국, 혹은 러시아를 상대로? 물론 쉽지 않다. 오늘날은 더 이상 인구의 대다수가 식량생산에 참여하는 농경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자의 연구를 토대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다.

우선 아사비야를 생각해보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족의 결속력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저자는 아사비야를 증가시키는 요소로 변경을 꼽았다. 그러나 오늘날 물리적 변경의 중요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예전에는 문명의 접촉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주로 변경을 마주했다면, 이제는 거주하는 장소와 상관없이 미디어를 통해 손쉽게 소식을 접할 수 있다. 물리적 변경은 심리적 변경으로 확장되었고, 더욱 복잡하고 예측이 힘들어졌다. 문뜩 2,000년 전 로마에 자신의 존재감을 전하려 눈물겹게 『갈리아 전쟁기』를 썼던 카이사르가 생각난다. 지금이었다면 그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사비야를 저해하는 원인인 분열에 대비해서도 현대인들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냈다. 바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엘리트층 간의 경쟁을 덜 폭력적인 방식으로 유도하며, 비교적 평화적인 권력 이양을 보장한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주의가 탄생한지는 아직 1세기밖에 되지 않았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아사비야의 1,000년 순환 주기 속에서는 미미한 시간이다. 게다가 현재 민주주의는 숱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기술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포퓰리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모두 쉽지 않은 도전들이다.

가끔은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거대한 틀을 조망해야 한다. 역사의 큰 흐름을 읽으며 전략을 짜야 한다. 개인이 되었든, 사회가 되었든, 아니면 국가가 되었든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문뜩 궁금해진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인류는 1,000년 뒤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과연 역사의 순환은 지속될 것인가?

 

<필자 소개>

1998년 끝자락에 태어났다. 지금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에 관심이 많다. <소년여행자>,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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