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의미 있기를 바란다. 살아서는 존재의 이유를 찾으려 부단히 애쓰고, 죽어서는 자신의 이름이 잊히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나 냉정히 따지면 한 사람은 77억 중 하나일 뿐. 인생은 짧고, 그 사람이 있든 없든 세상은 잘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 사람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인물들이 있다. 야코프 푸거의 일대기를 다룬 『자본가의 탄생』을 읽으며 문뜩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야코프 푸거는 1459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한스 푸거는 원래 농부였으나, 어느 날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도시로 이주했다. 실을 잣는 방직공이 된 한스는 머지않아 일을 외주로 돌릴 만큼 충분한 돈을 모았고, 그 자본금으로 옷감을 구입해 박람회에서 되파는 도매업을 벌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의 아내와 자식, 손주들은 상업에 종사하며 부를 키워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야코프 푸거는 그야말로 시대를 주름잡는 사업가가 되었다. 

푸거가 사업에 뛰어들며 가장 먼저 택한 전략은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허울뿐인 종이호랑이였다. 군대와 조세 수입이 없었던 황제는 항상 선거후들의 비위를 맞췄고, 선거후들은 자신을 귀찮게 하지만 않는다면 누가 황제가 되든 개의치 않았다. 1440년에 즉위한 프리드리히 3세는 헝가리 왕의 포위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빈에서 쫓겨났고,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황제는 세금 인상을 시도하다 납세자들에게 감금당했다. 막시밀리안은 신하들이 참수당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세금 액수를 제한하는 타협안을 내놓은 끝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푸거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빈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뒤 막시밀리안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황제는 푸거의 자금으로 군대를 꾸려 빈을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헝가리로 진군했다. 마침 헝가리는 튀르크의 공격으로 혼란에 빠진 터라, 막시밀리안과는 문호를 개방하는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당연하게도 헝가리에 가장 먼저 진출한 상인은 푸거였다. 그는 헝가리의 구리 광산에 투자해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1514년 튀르크가 공격의 수위를 높이자 정세가 불안해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헝가리 왕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결혼 동맹을 제안했지만, 막시밀리안은 다른 일로 분주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자 또 푸거가 나섰다. 푸거는 막시밀리안에게 헝가리와 동맹을 맺지 않으면 대출을 중단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막시밀리안은 푸거를 달래기 위해 헝가리의 울라슬로 국왕과 폴란드의 지기스문트 국왕을 만나 협정을 맺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의 꼭두각시가 되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울라슬로의 혈통이 끊어진 뒤 헝가리를 공식적으로 차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구축된 정치 체제는 1차 세계대전 때까지 무려 400년이나 이어지는데, 모두 3명의 국왕이 모여 푸거의 구리 광산의 미래를 논의한 결과였다. 

그런가하면 푸거의 사업에 있어 또 하나의 중추적 요소는 바로 교황청과의 관계였다. 푸거는 유럽 전역에 걸친 방대한 지점망을 바탕으로 독일에서 거둔 헌금을 로마로 운반하는 사업을 장악했다. 또한 대출과 이체로 영역을 확장하며 점차 ‘신의 은행가’로 등극했다. 그는 율리우스 2세의 교황 선거운동에 막대한 자금을 기부했으며, 추기경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당연히 율리우스는 이 은혜를 잊지 않고 교황청 화폐인 제카(zecca)의 주조권을 푸거에게 부여했다. 

율리우스 2세의 뒤를 이은 레오 10세는 푸거와 더욱 돈독한 사이였다. 당시 로마는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는 누가복음 6장 35절 말씀을 근거로 고리대금업을 금지하고 있었다. 대금업자들은 이자를 위약금, 경비, 선물, 손실 보전금 등으로 바꿔 부르며 죄책감을 덜었지만, 지식인들의 혹독한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푸거는 이러한 상황이 못마땅했다. 그는 토론회를 주최해 사악한 의도가 없는 거래는 고리대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발맞춰 레오가 이자 부과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교황 칙령에 서명하면서 대금업은 공식적으로 합법화되었다. 이 칙령으로 인해 금융이 가속화되었고, 근대식 경제의 출범이 앞당겨졌다.

두 사람은 곧이어 면죄부 판매사업도 함께 시작했다. 1514년 푸거는 베를린 근방을 다스리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후손 알브레히트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알브레히트는 그 돈을 레오의 개인 계좌에 입금하고 마인츠 대주교 직위를 구매했다. 거래가 성사되자 알브레히트는 푸거에게 돈을 갚아야 했는데, 그래서 등장한 방법이 바로 면죄부다. 사실 면죄부의 역사는 1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원정을 나설 병사들을 모집하기 위해 교황인(敎皇印)을 찍은 편지를 나눠주며 죄를 용서해 주었던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이후에도 인기를 끌어 주교들이 면죄부를 팔아 성당을 짓거나 다리를 개축하기도 했다.

레오와 알브레히트는 이번에도 면죄부를 이용해 독실한 신자들을 등쳐먹기로 했다. 우선 그럴듯한 구실로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내세웠다. 면죄부 판매원이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죄책감을 북돋았고, 그렇게 모인 돈의 절반은 성당 건축으로, 나머지 절반은 푸거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한편 작센에 거주하던 서른세 살의 어떤 학자는 면죄부 판매가 돈벌이 수작임을 간파하고 격분했다. 그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로, 면죄부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을 작성해서 교회 정문에 내붙인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사건은 종교개혁으로 이어져 유럽을 격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푸거는 실로 전환기의 인간이었다. 그의 시대에 금융이 태동했으며, 관습법이 로마법으로 대체되었다. 그는 자본주의로 향하는 문을 양손으로 잡고 활짝 열어젖혔다. 물론 푸거는 이기적이고 돈밖에 모르며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종교개혁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과연 인간사를 추동하는 힘이 욕망이라는 것을 우리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 욕망의 실체가 가장 잘 드러나는 수단이 돈이라는 사실을? 저자의 말대로 푸거는 ‘부 자체를 추구했으며,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초의 현대적 사업가’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그의 유산 위에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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