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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미국의 래그타임
  • 임하영
  • 승인 2019.05.2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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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은 짧지만 행간의 호흡은 길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잔잔한데, 읽고 있노라면 가쁜 들숨과 깊은 날숨이 허파를 오간다. 마치 그때의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1900년대 초. 당시 미국은 온갖 모순과 대립, 갈등, 욕망의 용광로였다. 성별, 계급, 인종의 차이에 따라 개개인은 철저히 구획되었고, 이에 맞서는 목소리는 아직 정치적으로 조직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기회의 문은 열려 있었다. 자본주의가 팽창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선로가 놓였고, 온갖 진기한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이 변화에 저항하거나, 적응하거나, 주저앉았다.

“니그로는 없었다. 이민자도 없었다.” “니그로는 분명 존재했다. 이민자도 분명 존재했다.” 『래그타임』의 첫 문단에는 이 두 문구가 시차를 두고 등장한다.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 이들의 뒤엉킨 삶의 궤적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은 바로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였다. 그는 니그로답지 않게 우아하고 예의바르며, 직업으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언제나 눈부신 모델 T 자동차를 타고 나타나는 콜하우스에게 ‘아버지’는 묻는다. “깜둥이 노래는 모르오?” 그는 답한다. “깜둥이 노래는 순회극단용입니다. 백인들이 검게 분장을 하고 부르는 노래이지요.”

어느 일요일 오후, 콜하우스는 소방서 앞길을 지나며 소방관들을 자극한다. 이는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유색인이 잘 차려입고 차를 가지는 것은 참으로 거슬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소방관들은 그의 앞뒤를 막고 통행료를 요구한다. 콜하우스가 거부하자 그의 차는 지붕이 찢겨 똥 범벅이 된다. 그리고 그는 공무집행방해죄로 경찰에 체포된다.

콜하우스는 소송을 통해 배상을 청구하고자 했다. 그는 몇 안 되는 흑인 변호사를 찾아갔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저는 우리 흑인들에게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당신 차에 똥덩어리를 놓아둔 일로 제가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 가서 항변하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아주 큰 오산입니다.” 결국 콜하우스는 소방서를 폭파하는 테러를 벌인다.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특별 주문한 인조가죽 천장을 댄 모델 T 포드 자동차를 원상 복구시켜 내게 넘겨라.’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중간 중간, 익숙한 실존인물들도 적잖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북극점을 정복한 로버트 피어리다. 그는 에스키모의 삶이 원시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에스키모들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체계 없이 살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피어리와 대원들은 체계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썰매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무슨 음식을 먹을 것인가, 음식은 어떤 깡통에 담아 가져갈 것인가, 깡통을 썰매에 어떤 식으로 묶어놓을 것인가, 어떤 옷을 속에 입고 어떤 옷을 겉에 입을 것인가 등등. 그들은 완벽한 체계로 자연이 주는 공포를 극복하려 애썼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된 체계는 에스키모의 생활방식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밖에도 “미국은 엄청난 실수”라는 프로이트, ‘모든 부분이 교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윤회의 비밀을 찾아 헤매는 모건의 모습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그때와 지금을 견주어 보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오래토록 사람들을 가둬왔던 삶의 테두리가 무너지는 시대. 산업구조가 흔들리고 생활양식이 변하는 시기. 개인들은 아수라장을 비집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구원을 찾아 헤맨다. 달가닥달가닥 흑색과 백색 건반을 번갈아 누르며 역사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100년 전 미국은 ‘래그타임’이었다면, 현재 한국을 흐르는 선율은 무엇일까? 거기에 맞춰 나비로 살지 불나방으로 살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필자 소개>

1998년 끝자락에 태어났다. 지금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에 관심이 많다. <소년여행자>,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을 지었다.

임하영  e-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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