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제목만큼이나 문장들이 시종일관 유쾌하다는 것이다. 맛깔난 글 솜씨로 버무린 일상의 이야기들을 전하며,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장애인들의 마음속에는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는 어린왕자가 살고 있다고. 그 어린왕자들이 무사히 지구에 안착할 수 있도록 지구인들이 조금만, 조금만 더 호의적으로 지켜봐 달라고 말이다.

 

결국 핵심은 지구인들이 시선을 바꾸는 것이다. 장애는 병이 아니며 하나의 특성일 뿐이다. 다름이 틀린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다름 그 자체를 받아들이면 된다. 또한 장애인은 불행한 존재가 아니다. 장애인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때로는 괴롭고 힘들지만 장애 아이와 함께하며 얻을 수 있는 기쁨 역시 크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닌 따스한 시선이다.

 

책의 가장 뒷부분에는 저자가 장애 아이를 갖게 된 지인에게 보내는 조언이 실려 있다. 처음에는 더없이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될 것이다. 거리에 나가면 따가운 시선을 맞닥뜨리고, 인간관계에서도 점점 소외될 것이다. 남편과의 관계도 악화될 것이다. 서로를 돌볼 마음의 여유 없이, 장애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며 원망할지도 모른다. 눈물 흘리는 밤이 많아질 것이고, 죽음에 대한 생각도 시시때때로 찾아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가 있는 아이 덕분에 더 많이 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더 나은 인간이 되어 더 행복한 일상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나는 책장을 넘기는 내내 저자의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이며 보다 성숙한 사회를 꿈꾸었다. 평일에는 최선을 다해 일하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하는 아빠, 아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며 장애를 끊임없이 공부하는 엄마, 동생을 진심으로 아끼고 보살피는 누나. 그들이 서로 의지하며 가꿔내는 하루하루. 그 한 조각을 우리가 스친다면, 그저 조그만 응원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결국 모두가 괜찮아질 수 있는 것일까?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책장을 덮으며 가슴이 너무도 아렸다. 장애 아이를 둔 대부분의 가정은 소득이 넉넉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맞벌이를 할 경우 당연히 아이를 24시간 돌볼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저떻게 유아기를 넘겼다고 해도, 사회 혹은 학교에서 마주하는 것은 뿌리 깊은 혐오의 시선이다. 너무나도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저자와는 달리, 삶의 최전선에 있는 가정들은 숱한 위기를 넘기고 넘기다 힘에 겨워 좌초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장애는 한 가정을 풍비박산 낼 수도 있다.

 

나중에 결혼을 하여 아이를 가졌는데 지적장애로 태어날 확률이 높다면 낙태를 하겠냐는 지인의 질문에, 당연히 아이를 낳을 여성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답했다. 그래도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면 어쩌겠냐는 집요한 물음에 끝내 똑 부러진 답을 내놓지 못했다.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계속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틀린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지만, 다르기에 틀릴 수밖에 없다면 어쩔 것인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영영 적응할 수도 강자가 될 수도 없다면 어떻게 생존해야 할까?

 

수년 전,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 주민토론회’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던 어머니들의 모습이 머리를 스친다. 이상으로 부유하는 인권이 일상에 스며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가족 개개인에게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부담지우기에, 감당해야 할 아픔과 멍에는 너무도 크고 무겁다.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결국 조금씩 연대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의 말을 되새겨본다. “우리 모두는 장애를 가질 수 있고, 가질지도 모르는 예비 장애인이다.” 주어를 바꿔서. ‘우리’에서 ‘나’로.

 

<필자 소개>

1998년 끝자락에 태어났다. 지금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에 관심이 많다. <소년여행자>,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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