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다센 ASML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재무 결과, 기술 성과, 성장, ESG 약속 등을 보여주는 2023년 연례 보고서를 발표하는 모습. 출처=ASML 공식 유튜브채널 갈무리 
로저 다센 ASML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재무 결과, 기술 성과, 성장, ESG 약속 등을 보여주는 2023년 연례 보고서를 발표하는 모습. 출처=ASML 공식 유튜브채널 갈무리 

[이코리아]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강화된 ESG 규칙을 해외 거래처에도 요구하고 나서면서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이 낮은 국내 기업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1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은 최근 연간 보고서를 통해 2040년까지 고객사를 포함해 모든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넷제로(Net Zero, 탄소 순배출량 0)'를 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ASML은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유일한 기업이기 때문에 '슈퍼을'로 불리는 회사다. 즉 ASML의 장비를 받지 못하면 최첨단 반도체 생산이 불가하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초미세 공정·고성능 경쟁이 치열해지는 점을 고려하면 ASML의 탄소중립 달성 요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넘어, 반도체 동맹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난달 14일(현지시간)에 발표된 ASML의 ‘2023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ASML은 대만과의 전력구매계약(PPA) 체결 사례를 소개하며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가 거의 없는 한국에서는 계속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PPA는 발전사가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력을 기업이 직접 구매하는 것으로, 탄소 감축의 주요 수단으로 꼽힌다. ASML은 올해 대만 사업장에서 사용할 전력의 75%를 재생에너지로 조달할 방침이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도 지난해 7월 반도체 제조업체들과 분석가들의 말을 빌어 “재생에너지의 낮은 에너지 조합과 이 지역의 성숙하고 인정된 재생에너지 인증의 부족으로 인해 아시아의 반도체 산업이 친환경적인 운영을 추구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두 가지 요인”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세계 반도체 장비 기업들이 속속 탈원전·탄소중립을 선언한 가운데 국내 기업들의 상황은 어떨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등 국내 주요 기업들도 RE100 달성을 선언한 상태다.

김경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에너지공단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삼성전자는 2022년 기준, 국내 전력사용량(2만1731기가와트시·GWh) 중 재생에너지 사용(1959GWh) 비율은 9.0%에 불과하다. 주요 반도체 생산시설이 국내에 있는 SK하이닉스 역시 재생에너지 전환율이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력 자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재생에너지가 생산량의 9% 미만을 차지한 반면, 원자력과 화석연료는 거의 90%에 달했다.

반대로 국제 에너지 트렌드는 재생에너지 친화적이다.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기업들은 점점 더 공급망 전반에서 재생에너지를 요구하는 추세다. 이에 발맞춰 지난해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는 한국을 포함한 123개 국가가 2030년까지 전 세계 재생에너지 발전 용량을 3배 늘리기로 약속했다.

RE100 캠페인은 국내 기업들이 재생에너지를 조달하는 데에 방해되는 해상풍력 입지 규제 및 인허가 간소화와 태양광 이격거리 규제 등 정책적 장벽을 제거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글로벌 RE100 캠페인을 주관하는 비영리단체 클라이밋 그룹의 RE100 총괄 올리 윌슨은 "RE100 캠페인은 대한민국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우리 캠페인에 더 많은 회원사들을 환영할 수 있어서 기쁜 마음이며, 특히 연간 전기 수요가 큰 한국 기업들이 가입하는 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재생에너지로 향하는 세계적인 경쟁은 불가피하며, 우리 회원사들이 이를 선도하고 있다. 세계에서 10번째로 큰 전기 소비자로서, 우리 회원사들은 재생에너지가 비즈니스적으로 중요하다는 신호를 국내외의 정책 결정자에게 강력히 보내고 있다"라고 말했다.

철강, 자동차, 반도체 등 수출 지향적이고 에너지 다소비적인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조는 국제적인 기후대응 기조 흐름에 맞춰 앞으로도 재생에너지 수요는 우상향할 전망이다. 기후솔루션이 지난 4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RE100에 가입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참여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서는 2050년까지 최대 10GW 전력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국내 기업들엔 저렴하고 풍부한 재생에너지가 도입될 수 있는 전력시장이 중요하지만, 국내 에너지 정책은 그에 동조하지 못하고 있다. 곧 윤곽이 드러날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는 기업들이 저렴하고 안정적인 재생에너지를 조달할 수 있도록 하는 계획과 방향성이 포함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ASML은 앞서 보고서에서 고객사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 어떤 대응을 할 것인지 밝히지 않았다. 다만 첨단 반도체 생산의 필수인 ASML 장비 공급 지연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익명의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업계가 막대한 양의 전기를 사용하지만 인프라의 경우는 기업이 아닌 정부와 같은 외부에서 대책이 서야 한다. 하지만 원자력 정책이 바뀐 것도 그렇고 타국에 비해 준비가 조금 부족한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탄소배출권을 통한 해결 방법도 있지만 아직 업계에서 거기에 대한 큰 그림이 별로 없다. 시장이 원하는 재생에너지를 통한 탄소저감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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