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어진동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사진=뉴시스
세종시 어진동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공정거래위원회가 일감 몰아주기 등 재벌 총수일가의 사익편취 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등의 위반행위의 고발에 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지침’(이하 고발지침) 개정안을 두고 한 달이 넘게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14일 논평을 내고 “사익편취 관련 총수일가 고발 원칙을 담은 고발지침 개정안에 대한 행정예고가 지난달 8일 종료됐으나 한 달이 지나도록 공정위는 개정안을 확정하지 않고 있다”라며 “공정위는 연내에 고발지침 개정안을 확정함으로써 사익편취 제재의 실효성을 높이고, 불필요한 논란에서도 벗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위는 지난 10월 19일 행정예고한 고발지침 개정안은 사익편취행위가 중대해 해당 기업을 고발할 때, 이에 관여한 특수관계인도 원칙적으로 함께 고발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공정위는 “그동안 중대한 사익편취행위를 한 사업자를 고발하더라도 공정위의 (임의)조사만으로는 특수관계인의 관여 정도를 명백히 입증하기 곤란해 특수관계인을 고발하지 못하는 사례가 있었다”라며 “그러나 중대한 사익편취행위에 특수관계인이 관여했다면 그 관여 정도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도록 함이 마땅하므로, 이를 원칙 고발대상으로 규정해 검찰 수사를 통해 특수관계인의 관여 정도를 명백히 밝힐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개정안의 취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개정안에 대한 재계의 반발은 예상보다 더 거셌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대한상공회의소·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단체 6곳은 행정예고 기간 종료를 이틀 남겨둔 지난달 6일 공동 성명을 내고 “이번 고발지침 행정예고안은 경제형벌을 완화하고, 경제 활성화에 초점이 맞춰진 정부의 정책기조와도 맞지 않는다”면서 “우리 법체계를 관통하는 기본 원칙에 맞지 않는 공정위의 고발지침 행정예고안은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경제단체들은 개정안의 고발 사유가 추상적이고 불분명해 상위법인 공정거래법과 충돌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모호한 기준으로 인해 경영인이 언제 고발 대상이 될지 알 수 없는 데다, 자칫 여론에 따라 고발당할 위험도 있어 기업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했다.

그러자 결국 공정위도 고발지침 개정안을 수정·보완해 다시 마련하기로 했다. 공정위는 “행정예고 기간중에 접수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충분히 감안하여 최종 개정안을 확정할 예정”이라고 해명했으나, 재계의 거센 반발에 공정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최근 대통령실과 경제단체 간의 관계는 매우 가까워지고 있는 추세다. 특히 2016년 국정농단 사태로 정부 행사에서 배제돼온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 9월 한국경제인협회로 이름을 바꾼 뒤 ‘재계 맏형’의 위상을 되찾고 있다. 최근에는 류진 한경협 회장이 윤석열 대통령의 부산 방문 일정에 동행하는 등 정부와의 파트너십도 돈독히 다져나가는 분위기다. 

이 때문인지 한경협은 고발지침 외에도 공정위를 향해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주요 대기업의 해외 매출비중이 전체 매출의 과반을 훌쩍 넘을 정도로 글로벌 경쟁압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외국 경쟁기업에는 적용되지 않는 경제력집중 규제는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이라며 공정거래법제의 규제를 문제를 지적했다.

또한 지난 11일에는 킬러·민생 규제 13건에 대한 개선 방안을 국무조정실에 전달했는데, 공정위 관련 건이 8건으로 가장 많았다. 

게다가 윤석열 대통령이 규제 혁파를 통한 경제 활성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도 한경협 등 경제단체에게는 우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정위가 재계의 반대를 고려하지 않고 고발지침 개정을 강행하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재계의 반대 근거가 빈약하다며 공정위가 고발지침 개정에 다시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14일 논평에서 “사익편취행위 제재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거래의 주체에만 과징금을 부과하는 방식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해당 거래의 최종 수혜자인 재벌 총수일가에는 실질적인 제재가 미치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라며 이를 개선한 개정안은 “사익편취 규제의 취지를 살리기 위한 것이지, 새로운 규제나 규제 강화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이어 “고발지침이 ‘특수관계인으로서 법 위반 정도가 중대한 자’로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에서, 공정위가 보수적으로 해석하여 특수관계인의 지시나 관여가 중대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고발하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라며 “이는 공정거래법 집행의 예측가능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고발지침 개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영활동 위축을 우려하는 재계와 조속한 확정·시행을 요구하는 시민사회단체의 목소리가 맞부딪히고 있는 만큼, 공정위의 고민도 더욱 길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고발지침 개정 논의를 두고 공정위가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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