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전 언론인.
임순만 전 언론인.

[이코리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중대한 분수령을 만났다고 외신이 전하고 있다. 미국의 중재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인질을 하루에 50명 이상 씩 석방하는 대가로 교전을 일시 중단하는 내용의 협상 타결이 임박했다고 미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가 보도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가하면서 납치해 간 인질이 240여 명이다. 하루에 인질을 50명씩 풀어준다면 최소 5일이 소요된다. 인질이 석방되는 기간에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교전을 중단하면 이 기간만큼은 추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 

백악관은 아직 공식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브렛 맥거크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중동·북아프리카 조정관은 “인질들이 풀려나면 인도적 구호품 반입이 크게 늘고 상당한 기간 교전 중지로 이어질 것”이라며 협상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이번 전쟁은 하마스가 촉발했지만 이스라엘의 보복으로 가자지구에서 숨진 민간인 희생자가 1만2000명이 넘는다. 이중 어린이만 5000여 명이다. 무고한 희생자들이 급증하면서 세계 100여개 국가가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했으나 이스라엘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하마스는 인질들을 방패로 내세웠지만 가자지구 사망자만 늘어났다.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것은 적대감이 아니라 협동 정신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우정과 사랑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불화를 피하고 분쟁을 조절하려고 노력한다. 우호와 친절은 으뜸가는 덕목이다. 그러나 우호는 법과 제도라는 엄격한 속박의 테두리 안에서만 넘쳐난다. 그 너머는 테러, 감금, 전쟁 같은 것으로 구성된다. 현대의 전쟁에 중용이나 자제는 없다. 

고대에는 전쟁이 왕족과 귀족들의 싸움이었다. 말을 사육할 수 있고, 기마전술을 익힐 수 있는 지배계급만이 전쟁에 나갔다. 말을 가질 수 없는 평민들은 전쟁에서 제외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쟁을 보면 전쟁에 참여할 수 없는 평민들은 참정권 역시 제외되었다. 전쟁과 정치참여는 전적으로 귀족의 몫이었다. 그러다 전쟁이 대형화되고 중장보병들이 필요해지면서 평민들이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고, 전투에 참여한 만큼의 참정권이 보장되었다. 이제 전쟁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은 여자, 어린이, 장애인, 노인 등에 국한한다. 나머지는 모든 사람이 전쟁에 동원되고, 참화는 대량으로 이루어진다. 

현대 전쟁의 결과는 패자가 노예가 되거나 집단 몰살되는 것이 아니라, 낯익은 땅에서 열악한 땅으로 이주하거나 피지배자가 되는 방식이다. 우크라이나 전이나 이-팔 전쟁이 바로 그런 양상이다. 패배자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멸절당하는 수모를 겪게 마련이다. 문화는 적대적인 영향력에 상처를 입는 취약성을 갖고 있다. 이런 인간들의 전쟁수행 방식 중에서 ‘이상적’인 전쟁의 방식을 거론한 사람이 <세계전쟁사>를 집필한 영국의 존 키건(John Keegan)이다. 그는 세계 역사에서 중국과 이슬람의 전쟁이 지성적인 것이었다고 꼽는다. 

이민족이 초원 지대로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축조한 중국은 예외적으로 침입에 성공한 침입자들을 한화(漢化)시켰고, 그들을 중국문명의 가치에 복속시켰다. 중국의 북방왕조인 요·금·원·청이 대표적인 예다. 북방왕조는 중국 전통의 중용(中庸) 사상을 받아들여 왕조를 유지시켰다. 

키건이 전쟁수행의 역사에서 또다른 지성과 억제의 예로 든 것이 이슬람 전사다.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서방과 이슬람이 벌인 십자군 전쟁에서 아랍전사들은 정면대결을 회피하면서 성전(聖戰) 수행을 위한 제한적 전투에 치중했다. 이슬람의 ‘성전’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방식이 ‘정면대결’이라는 서방의 전쟁방식에 지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을 결합시킴으로써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화적 교류가 가능하게 됐다는 것이다.  

쿠르드족 출신의 무슬림 장군 살라딘은 십자군의 침략에 맞서 아랍의 자존심을 지킨 전사로 기록돼 있다. 260년간 이집트를 다스려 온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권 전역을 지배하는 왕이 된 살라딘은 1187년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 1099년에 제1차 십자군이 무자비한 대량 학살 끝에 예루살렘을 장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살라딘은 기독교인과 협상을 벌인 끝에 피 흘리지 않고 입성했다. 무슬림 측에서 보자면 88년 만의 감격적인 탈환이었다. 이때 살라딘은 “우리가 기독교인들처럼 상대편을 죽인다면 이슬람교도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라며 남다른 철학을 피력했다. 

예루살렘을 빼앗긴 유럽은 영국의 리처드 1세를 내세워 십자군 3차 전쟁에 나섰다. 리처드와 살라딘은 역사적인 호적수였다. 살라딘과 리처드의 밀고 밀리는 전투가 계속됐지만, 상황은 유럽군에게 불리했다. 리처드는 적은 병력으로 용맹스럽게 싸우던 중 말이 화살에 맞아 땅에 떨어졌다. 이때 살라딘은 적장을 죽이는 대신 아랍의 명마를 보내 나머지 승부를 가리자고 했다. 회생한 리처드는 승세를 몰아 예루살렘을 탈환할 기세였다. 

하지만 그의 앞길을 막은 것은 살라딘이 아니라 지독한 전염병이었다. 이때도 살라딘은 신선한 과일을 보내 리처드를 극진히 문병했다. 리처드는 깊이 감동했다. 두 사람은 1192년 9월, 약 일주일간의 협상 끝에 야파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 내용은 향후 3년간 휴전한다, 양측 모두가 각자 현 상황을 그대로 유지한다, 기독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까지 자유롭고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다고 보장한다, 등 세 가지였다. 조약을 체결한 리처드는 성지를 떠나며 “3년 후에 돌아와서 기필코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투지를 불태웠다. 살라딘은 리처드에게 “예루살렘을 잃어야만 한다면 당신에게 잃고 싶다”고 화답했다. 그러나 둘의 전투와 우정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리처드는 귀국길에 불화가 있던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5세에게 붙잡혀 1년 반이나 죄수 생활을 하다가 영국으로 돌아가 왕위를 되찾았지만 1199년에 전사했다. 살라딘은 그보다 앞서 1193년에 병사했다. 

십자군의 태동 원인은 종교적 배타성이지만, 봉건영주와 하급 기사들, 상인과 농부 등 입장에 따라 욕망하는 것이 서로 달랐다. 그들은 이슬람 전사를 능가할 수 없었다. 살라딘의 기사도적인 행동은 단테의 <신곡>에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가벼운 벌을 받는 고결한 이교도로 등장한다. 2000년 요한 바오르 2세 교황은 가톨릭의 십자군 전쟁을 사죄했다.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인구통계학자인 엠마뉘엘 토드는 최근 간행된 일본 월간 <문예춘추>(2023년 12월호)에 기고한 “미국은 이미 패배하고 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승패는 사실상 정해졌다. 미국의 패배는 거의 확정돼 있다”고 분석했다. 토드는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로 △미국이 충분한 무기, 탄약을 물리적으로 우크라이나군에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반격은 거의 실패로 끝났다. △군수품을 계속 소비하는 장기전에서 무기생산력은 러시아가 미국보다 강하다. △미국의 우크라전쟁 개입 목적은 독일-러시아를 분리시키는 것이지만 긴 흐름 속에서 본다면 독일과 러시아의 접근은 자연스럽다. △지금 세계의 위기는 앵글로색슨 세계의 위기다. △사우디와 이란이 미국이 아니라 중국의 중재로 국교를 정상화하고, 인도와 브라질이 미국이 주도한 러시아 제재를 거의 무시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토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도 자제력이 결여된 미국의 움직임이 위험을 높이고 있다고 본다. 미국이 세계 각지의 문제에 고개를 들이밀고 있으나 매우 즉흥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동맹국인 이스라엘에 이끌린 미국이 우크라 전쟁의 경우처럼 ‘함정’에 빠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파악한다. 이-팔 분쟁, 우크라 전쟁, 그리고 폴란드의 딜레마는 한반도 분단의 비극과 거의 동일한 구조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토드와 같은 관점이 세계 전문가들의 주류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가 늘어나고, 주요 매체에 특필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미국은 우크라 전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이-팔 분쟁을 어떻게 화해로 이끌 것인가. 지구촌의 갈등을 풀어갈 새로운 지혜가 미국의 앞날을 만들어갈 것이다. 

임순만 작가·전 언론인 (국민일보 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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