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어진동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사진=뉴시스
세종시 어진동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공정거래위원회가 ‘일감 몰아주기’를 한 기업을 고발할 때 이에 관여한 총수일가 등 특수관계인도 함께 고발하도록 하는 지침 개정을 추진하다, 재계의 반발에 부딪혀 재검토에 들어갔다. 반면, 시민단체는 일감 몰아주기로 인한 이익이 총수에게 돌아가는 만큼, 공정위가 원안 그대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8일 업계 및 관련 부처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달 19일부터 이달 8일까지 행정예고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등의 위반행위의 고발에 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지침’ 개정안을 수정·보완해 다시 마련하기로 했다. 

개정안은 공정거래법상 ‘특수관계인에 대한 부당한 이익제공 등’의 행위(사익편취)가 중대해 해당 행위를 한 법인을 고발하는 경우, 이에 관여한 특수관계인도 원칙적으로 고발하도록 규정했다. 

공정위는 지난달 19일 행정예고를 발표하며 “그동안에는 중대한 사익편취행위를 한 사업자를 고발하더라도 공정위의 (임의)조사만으로는 특수관계인의 관여 정도를 명백히 입증하기 곤란해 특수관계인을 고발하지 못하는 사례가 있었다”라며 “그러나 중대한 사익편취행위에 특수관계인이 관여하였다면 그 관여 정도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도록 함이 마땅하므로, 이를 원칙 고발대상으로 규정해 검찰 수사를 통해 특수관계인의 관여 정도를 명백히 밝힐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개정안의 취지를 설명한 바 있다. 

공정위의 이번 고발지침 개정안과 관련해 지난 3월 태광그룹 일감 몰아주기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례 취지를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대법원은 “특수관계인이 기업집단에 대하여 가지는 영향력을 고려하여 특수관계인의 이익제공행위에 대한 ‘지시’뿐만 아니라 ‘관여’까지 금지하고 있는데, 부당한 이익제공행위와 관련된 보고를 받고 이를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승인하였다면 그 행위에 관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 재계, “고발지침 개정안은 상위법 위반... 전속고발권 취지에도 어긋나”

문제는 해당 개정안이 재계로부터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실제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대한상공회의소·한국무역협회·한국경영자총협회·한국중견기업연합회·한국상장회사협의회 등 6개 경제단체는 지난 6일 공동 성명을 내고 “고발지침 행정예고안은 사업자의 일감몰아주기 규제 위반이 인정되면 특수관계인의 ‘법 위반 정도가 객관적으로 명백·중대하지 않더라도’ 원칙 고발하도록 하고 있어 상위법에서 정한 고발요건에 반한다”고 지적했다.

이들 단체는 이어 “공정위가 법 위반의 명백·중대함을 입증하지 않고 고발하도록 한 것은 고발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공정위의 재량권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며 지침 개정이 공정위에 전속고발권을 부여한 취지에도 어긋난다고 말했다.

재계는 원안대로 지침이 개정될 경우 여론에 따라 총수일가에 대한 고발이 남발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들 단체는 “고발요건이 불명확하고 광범위해 법적 판단이 아닌, 국민정서, 여론에 따라 고발여부가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라며 “수범자는 불분명하고 광범위한 고발요건으로 인해 어떤 경우에 고발을 당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등 법적 예측가능성이 저하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는 또한 고물가, 저성장, 무역적자에 전쟁으로 인한 불확실성까지 더해진 상황에서 이번 지침 개정안 시행될 경우 기업의 경영활동이 더욱 위축될 것이라며, 고용·투자 확대를 위해 기업인에 대한 형벌 규정을 대폭 완화하기로 한 정부의 정책기조와도 배치된다고 강조했다.

◇ 시민단체, “고발지침 개정안, 원안대로 처리돼야...”

한편, 공정위가 고발지침 개정안에 대한 재검토에 들어가자 시민단체에서는 정부가 재계의 입장만을 반영하고 있다며 반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실제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8일 공정위에 고발지침 개정안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의견서에서 “이번 고발지침 개정안은 기업의 이익을 부당하게 개인의 사익으로 편취하는 행위의 중대성과 사익편취에 관여한 정도의 폭을 넓게 인정한 사법적 해석을 잘 수용했고,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을 위해 회사에 대한 특수관계인의 부당한 이익 편취를 근절’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에도 부합한 것”이라며 지지 의견을 밝혔다.

고발지침 개정안이 상위법과 모순된다는 재계의 주장에 대해서는 “공정위에 의해 부당한 이익제공 사실이 밝혀져 제재가 결정되고, 나아가 해당 사건의 법인이 고발되는 수준에 이른다면,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현행 공정거래법 제129조 제2항에 따른 ‘죄 중 그 위반의 정도가 객관적으로 명백하고 중대하여 경쟁질서를 현저히 해친다고 인정하는 경우’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라고 반박했다.

이들은 “그동안 공정위에서 다수 회사의 사익편취 행위를 적발해 제재하고 법인을 고발해도 사익편취 행위에 연루된 특수관계인을 고발하지 않은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곤 했다”라며 “이러한 과거 사례는 회사와 주주, 사업 기회를 박탈당한 중소기업 등 회사의 여러 이해관계자들에게 손해를 입힌 동일인, 특수관계인 등에 대한 법의 집행과 심판이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어 “따라서 회사 이익을 사익으로 편취한 특수관계인에게 책임을 묻는 고발지침 개정은 타당하며, 원칙에 따라 원안에서 후퇴없이 처리되어야 할 것”이라며 “앞으로도 공정한 시장경제 확립을 위한 법·제도 개선 과정에서 재계의 일방적인 주장만이 반영되지 않도록 비판하고 견제하는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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