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한 시중은행 직원이 미국 달러화를 검수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사진은 한 시중은행 직원이 미국 달러화를 검수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올 상반기 국내 주요 대기업들의 현금·현금성자산(이하 현금)이 1년 전보다 62조원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정부가 국내 투자 활성화 취지로 법인세 최소세율을 낮추면서 기업들의 투자를 장려했지만 현실은 대기업의 현금 자산만 늘려줬다는 지적이 나온다. 

12일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가 500대기업 중 지난 2021년부터 2023년까지 반기보고서를 제출한 278개 기업(금융사 제외)을 대상으로 현금 및 이익잉여금 현황을 조사한 결과, 올해 6월말 기준 대기업의 현금은 총 294조8254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작년 6월 말의 232조5천918억원보다 62조2천336억원(26.8%) 늘어난 규모다.

같은 기간 이익잉여금은 1천136조3천612억원에서 1천189조2천233억원으로 52조8621억원(4.7%) 증가해 현금 증가 규모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현금 증가분의 64.8%는 삼성전자가 차지했다. 삼성전자 상반기 말 현금 보유량은 79조9천198억원으로 1년 전 39조5천831억원보다 40조3천367억원, 101.9% 증가했다. 삼성전자는 올 상반기 단기금융상품을 대거 처분해 현금 유동성을 확보했다.

1년 새 현금 보유량이 1조원 이상 늘어난 기업은 삼성전자를 비롯해 현대자동차, LG에너지솔루션 등 9곳이다. 

현대차는 20조7천777억원으로 4조6천483억원(28.8%) 늘렸으며, LG에너지솔루션은 4조8천602억원으로 2조8천767억원(145.0%) 늘렸다. 

이밖에 1조원 이상 현금 보유량을 늘린 기업으로는 ▲SK에너지(1조8442억원) ▲두산에너빌리티(1조6271억원) ▲LG화학(1조5676억원) ▲SK하이닉스(1조4945억원) ▲삼성물산(1조2496억원) ▲현대삼호중공업(1조151억원) 등이 있다.

김경준 CEO스코어 대표는 “기업 대다수가 이익잉여금 증가액 이상으로 현금을 늘려 가용 자원을 확보한 상태”라며 “불안정한 경제 환경 탓에 내외부적으로 위기 요인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변동성에 대응하기 위해 리스크 관리 역량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기업들의 리스크 관리 차원 외에 대기업의 현금성 자산이 대폭 늘어난 것에 대해 법인세 인하의 영향도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앞서 정부는 '2022년 세제개편안'을 발표하며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추기로 했다. 또한 과표 구간도 △5억~200억원 미만 20% △200억원 초과 22%로 단순화하고, 과표 구간 5억원 이하 중소·중견기업에는 특례세율 10%를 적용한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기재부 국정감사에서 법인세 인하로 인해 투자 확대와 일자리 창출 효과 및 성장 효과가 있다고 발언한 바 있다. 

하지만 정부의 법인세 인하로 인한 선순환 기대와는 달리 대기업들은 현금성 자산이 대폭 늘었음에도 투자는 물론 인력 확충에도 소극적인 상황이다. 

국내 대기업 64%는 올 하반기 대졸 신규채용 계획이 없거나 미정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하반기 신규채용 계획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 기업의 48.0%는 올해 하반기 신규채용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고, 16.6%는 신규채용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채용 계획이 없거나 아직 수립하지 못한 곳이 64.6%로, 작년 하반기보다 조금 늘었다. 

하반기 신규채용 계획을 수립한 기업은 전체의 35.4%로, 작년 하반기에 비해 신규채용을 늘리겠다고 응답한 기업 13%포인트 줄어든 반면, 줄이겠다는 응답11.4%포인트나 늘었다. 

신규채용을 하지 않거나 채용 규모를 늘리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수익성 악화·경영 불확실성 대응을 위한 긴축 경영’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또 ‘글로벌 경기침체 장기화, 고금리·고환율에 따른 경기 악화’와 ‘원자재 가격 상승·인건비 증가 등에 대비한 비용 절감’도 주요 이유로 꼽혔다. 

한국 기업들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법인세 많이 내고 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국회예산정책처의 2022 조세수첩에서 발표한 OECD 국가들과 지방세를 포함한 법인세 최고 세율을 비교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법인세를 인하하면 OECD 평균보다도 낮아지며 G7 국가들의 평균인 32.8% 보다 10% 가까이 낮아진다. 

또한 2015년부터 2019년까지의 총조세 및 부담률 추이를 정리한 세계은행 통계자료를 보면 한국은 33%의 부담률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같은 기간 40%대의 세계평균 및 OECD 평균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세수 감소도 문제다. 기재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누적 국세수입은 178.5조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9.7조원이나 감소했다. 특히 경기침체로 기업 실적이 악화되면서 상반기 법인세 수입(46.7조원)이 전년 동기 대비 16.8조원(-26.4%)이나 줄어들었다.

다만 정부가 국내 투자 활성화 취지로 개편한 법인세법 영향으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그룹 등 주요 그룹을 중심으로 해외법인 소득을 국내로 투자하는 '자본 리쇼어링'이 올해 본격화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 볼 만 하다. 

재계에 따르면 현대자동차그룹은 해외법인이 벌어들인 돈 59억 달러를  연내(상반기 중 79%) 국내로 들여 오기로 했다. 국내로 유입되는 약 7조 8000억원을 국내 투자 재원으로 활용한다고 발표했는데, 현대차는 약 2조8000억원, 기아는 4조4000억원, 모비스는 약 2500억원이다.

현대차그룹은 이 배당금으로 현대차의 울산 전기차 전용공장과 기아 오토랜드 화성의 고객 맞춤형 전기차 전용 공장 신설 등에 이용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법인세법 개정으로 올해부터 해외에서 이미 과세된 배당금에 대해서 배당금의 5%에 한해 국내에 과세되고 나머지 95%는 면제된다. 정부는 "해외 자회사 배당금에 대한 이중과세 조정을 확대해 기업이 해외에 유보한 소득의 국내 유입 유도할 것"이라며 개편 취지를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올 1분기 8조 원이 넘는 배당금을 해외에서 들여왔다. 삼성전자 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4분기 배당금수익은 8조4400억원으로, 전년 동기(1275억원)보다 무려 60배가 늘었다. 

글로벌 반도체 침체기를 맞아 실적이 나빠진 탓에 국내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차원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도 현대차처럼 자금을 연구개발과 각종 시설투자에 투입한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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