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전 언론인.
임순만 전 언론인.

[이코리아] 26일 한미 정상회담을 비롯해 27일 미국 의회 연설 등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한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 일정이 펼쳐진다. 그런데도 국내외 정세는 폭풍 전야와 같이 위태로운 기운이 서려 있다. 러시아는 윤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가능성 시사 발언에 대해 대북 첨단 무기 제공 등을 거론하며 반발하고 있고, 중국은 윤 대통령의 힘에 의한 대만해협 현상 변경 반대 발언에 연일 수위 높은 반격을 가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미국에 가면서 러시아와 중국을 때려본 셈이다. 

국내에서는 지난 3월 6일 정부가 일본의 강제동원 해법으로 ‘제3자 변제’ 방침을 밝힌 이후, 50여 일이 지난 현재까지 50건이 넘는 규탄 성명이 발표됐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3월 20일 전주에서 ‘정권 퇴진 촉구’ 미사를 개최한 후 전국을 순회하며 같은 내용의 시국미사를 진행하고 있고, 연일 대학교수들의 성명이 나온다. 정권 출범 1년이 못 된 시기에 이같이 반대의견이 폭발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런 어수선함의 근본 배경은 한반도를 둘러싼 한미일 vs 북중러의 신냉전구도가 본격화 되는 데 있다. 이런 와중에도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보란 듯이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공물을 봉납했다.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 내용을 도감청 했음에도 정부는 꿀 먹은 벙어리행세를 하고 지나갔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일본을 향해 구애에 가까운 자세를 보이고 있음에도, 미국의 도감청이 양국 관계를 해칠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애써 강조하며 인내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우방으로부터 얻어오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얼어붙어 있던 한일관계를 회복하여 양국의 미래를 함께 준비하자는 주장은 그 자체로는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신냉전구도가 형성되는 시대에 혈맹인 미국 편에 가담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왜 미·일 등 우방의 선린관계는 향상되지 않고, 국민의 반응은 냉담해지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정부가 국민을 설득하는 데 인색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가 일제 강제 동원 해법으로 제3자 변제 방침을 들고나온 것이나 미국 정보당국의 한국 주요 기관 도감청 문제에 대응한 것은 모두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했다. 설득하는 데 성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대한민국 대법원의 전원일치 판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대국민 설명을 건너뛰었다. 미국 언론이 대한민국 국가안전보장회의 도감청 내용을 보도했는데도 “한미 관계를 흔들 정도는 아니다”라거나 “공개된 정보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식으로 도감청을 감싸는듯한 태도를 보였다. 

문제가 된 윤 대통령의 로이터통신 회견도 국민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가능성 시사 발언이나 중국의 힘에 의한 대만해협 현상 변경 반대 발언은 국제적으로 매우 중차대한 문제다. 이런 발언이 나오기까지는 치밀한 절차와 흔들릴 수 없는 논리가 마련돼 있어야 한다. 가정이라는 전제 아래 외신에 불쑥 던질 수 있는 맥락을 가진 사안은 결코 아니다. 

이런 현상이 왜 중첩돼 나타나는 것일까. 윤석열 정부가 집권의 프로세스를 너무 간단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대통령실 이전 문제가 여러 측면의 검토를 생략하고 초단기간 내에 결정되었듯, 다방면으로 검토하고 논의돼야 할 과정을 생략하고 국정의 프로세스가 몇 사람에 의해 쉽사리 결정되고 집행되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존중해야 할 우리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심 부족 현상이 두드러진다. 

21세기 한국의 경제와 문화는 과거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경제도 그렇지만 특히 문화는 우리가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지구촌에서 가장 발랄한 상태로 솟구쳐오르는 중이다. 여기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례가 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국민에게 어떤 문화와 문명을 일궈갈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한 사례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에 관해 심도 있는 담론이 펼쳐지고 있다면 지금처럼 사회 분위기가 진영 간 적대적으로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화는 적대시되는 걸 감싸고 풀어주는 힘을 갖고 있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반대진영의 의견을 무시하는 정책으로는 내부적인 지지를 형성하기 어렵다. 내부 지지가 부족하면 외부로 향하는 동력도 생기지 않는다. 문화는 결코 ​어느 한쪽을 향하여 흘러가지 않는다. 이 점에 윤석열 정부의 맹점이 있는 게 아닐까. 

어떤 문명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그런 합의를 바탕으로 미래의 길을 헤쳐 나가는 노력을 더 많이 기울여야 한다. 그랬더라면 2012년 이후 일본 극우세력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는 듯한 정부 여당의 일제 강제징용해법은 다른 형태로 마련됐을 것이다. 우리 문화와 역사를 중시하는 시각이었다면 1965년 한국 정부가 국민의 개인 청구권을 일괄 대리할 수 없다는 관점을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주장대로 한국인 노동자의 강제 동원이 없었단 말인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 동원 노동자의 손실보상과 손해배상 청구권이 모두 소멸한 것일까. 이 문제의 해법은 당연히 역사와 문화를 중시하는 시각에서 출발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해법이 나오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에 귀빈회(貴賓會 Welcome Society)라는 것이 있었다. 상류사회 클럽이다. 소위 ‘귀빈’ 회원들은 ‘JTB(Japan Tourist Bureau)’라는 것을 만들어 세계 여행을 다녔다. 서양인들의 세계 여행 바람에 자극받아 만든 JTB는 러일전쟁의 전리품으로 러시아로부터 권익을 이어받은 남만주철도를 이용해 세계로 나가기 위한 기구였다. JTB는 만철(滿鐵)을 경유하는 ‘세계 일주 주유권’과 런던까지 가는 ‘동반구 주유권’이라는 기차표를 팔았다. 만주나 상하이로, 시베리아나 유럽으로 이어지는 그들 여행의 출발은 오로지 조선이었다. 조선이 없었다면 그들의 여행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귀빈회는 조선을 여행지로 꼽는데 인색했다. 과문하지만,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그 많던 여행 포스터와 책자에 조선 관련 내용은 거의 없었다고 알고 있다. 있었더라고 극소수였을 것이다. 조선의 설악산이나 금강산은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어려운 여행지였고, 조선에 회중반점(匯中飯店)이나 일품향(一品香), 런던호텔이나 파리호텔 같은 급은 아니더라도 손탁호텔도 있었고 객주나 여각 같은 한국 스타일의 숙소도 있었다. 

일본은 지금도 그런 자세를 고수하려고 한다. 우리가 거기에 맞출 필요가 없다. 미국의 한국 대통령실 도감청도 45년 전 발각된 이래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소중히 가꾸는 자세가 뒷받침돼야 외교적으로도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작은 역사도 소중한 팩트다. 우리 내부를 경시하면 곤란하다. 지구촌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국내를 먼저 잘 살피고 이해해야 한다. 스케일(scale)이 크기 위해서는 디테일(detail)에 강해야 한다. 

임순만 작가 · 전 국민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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