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전 언론인.
임순만 전 언론인.

[이코리아]지난해 9월 30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자포리자주, 헤르손주 등 러시아 인근 4개 지역 주민들이 러시아 연방 가입에 찬성한 투표 결과를 수락하는 연설을 했다. 다음날 크렘린궁에서 영어로 번역해 공식 발표한 이 장문의 연설은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명연설’이라는 평을 받으며 상당한 화제를 모은 바 았다. 

먼저 일부 대목을 옮겨본다. 

“소련이 붕괴되었을 때, 서방은 세계와 우리 모두가 영원히 자신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라고 결정했습니다. 1991년, 서방은 러시아가 그러한 충격 후에 결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고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뻔했습니다. 우리는 배고프고 춥고 절망적인 끔찍한 1990년대를 기억합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서 있었고, 살아났고, 더 강해졌고, 세계에서 정당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서방은 우리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계속 찾았고, 그들이 항상 꿈꿔왔던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분열시키고, 우리 민족을 서로 적대시하며, 가난과 멸종에 처하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계속 찾고 있습니다. 천혜의 부와 자원,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명령을 따를 수도 없고 따르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가진, 이 거대한 영토를 가진 위대한 나라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국경 불가침의 원칙을 짓밟은 것은 이른바 서방이었고, 이제는 누가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 누가 자격이 없는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정치적 국수주의와 인종주의에 동의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는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변화의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부상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중심은 국제사회의 대다수를 대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다극성을 통해 그들의 주권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봅니다. 그것은 진정한 자유, 역사적 전망, 그리고 조화로운 과정에 대한 독립적이고 창조적이며 독특한 형태의 개발에 대한 권리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연설에서 푸틴은 미국이 한국의 최고위 관리들을 감시 도청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실제로 독일, 일본, 한국 그리고 다른 나라들을 계속 점령하고 있으면서 말로만 그 나라들을 평등한 동맹이라고 냉소적으로 부릅니다. 전 세계는 이 나라들의 최고위 관리들이 감시당하고 있고 그들의 사무실과 집에 도청장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와 노예처럼 묵묵히 그리고 순순히 이 오만한 행동을 견디는 자 모두에게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최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한국 대통령실의 외교·안보사령부를 불법으로 감청했다고 미국의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이 보도했다. 미국 SNS에 유출된 미 국방부의 비밀문서엔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무기 지원요청과 관련해 김성한 전 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이 나눈 대화가 생생하게 실려있다. 이 전 비서관은 전쟁 중인 국가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정책을 어길 수 없다고 말한다. 김 실장은 그 대안으로 폴란드에 155mm 포탄 33만 발을 수출하고 폴란드가 이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우회 지원 방안을 제시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압박을 가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내용도 나온다. 

이 보도 이후 한미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두고 김 실장과 이 비서관의 석연찮은 경질의 진짜 배경이 우크라이나 포탄 지원 문제와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한국은 그동안 우크라이나에 방독면과 방탄조끼, 의약품 등을 지원하되 살상 무기 제공에는 선을 그어왔다. 그러나 작년 11월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통해 미국이 자국 보유 155㎜ 포탄을 먼저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고 한국에서 포탄 10만 발을 구매해 재고를 메우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유출된 문서는 100쪽에 이르며 1급 기밀만 100건이 넘는다. 국가안보국(NSA)과 CIA, ·국무부 정보조사국 등의 미국 정부 정보기구 보고서들을 미 합동참모본부가 취합해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문건은 지난 2월부터 텔레그램과 트위터, 게이머 채팅 프로그램인 디스코드 등을 통해 사진 형태로 유포됐다고 한다.

미국의 우리나라 도·감청 사실이 적발돼 표면에 드러난 것만 이번이 세 번째다. 카터 행정부 시기, 미 중앙정보국이 박정희 정부 시절 청와대를 감청했다는 의혹이 드러나면서 한미관계가 격랑에 휩싸인 적이 있다. 2013년에는 미 국가안보국(NSA) 직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도청사실을 폭로했다. 스노든은 NSA가 민간인 사찰 프로그램을 통해 자국민 수 백 만 명의 개인정보를 무단 수집할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프랑스, 독일 등 우방국 정상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특히 NSA가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의 휴대전화까지 감청한 사실이 드러나 양국의 갈등은 상당 기간 계속됐다. 급기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동맹국을 상대로 더 이상 도감청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021년 5월 덴마크 공영방송은 NSA가 2012~2014년 덴마크를 지나는 해저 통신 케이블을 통해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프랑스 정치인들의 전화 통화와 인터넷 정보에 접근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동맹국 사이에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히 비판했고 백악관은 논란 해소를 위해 안보 채널을 통해 동맹국들과 공조하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또다시 미국의 도감청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번 보도에 대해 대통령실은 “한미 관계를 흔들 정도는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브리핑을 통해 “과거의 전례,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대응책을 한번 보겠다. 제기된 문제에 대해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11일 “공개된 정보 상당수가 위조됐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좀 더 신뢰를 굳건히 하고 양국이 함께 협력하는 시스템을 강화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미온하기 짝이 없는 대응이다. 미국의 공식 조사와 발표만을 기다려서는 곤란하다. 한국 내부 사정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고, 국가적인 자존심도 고려해야 한다. 국가 외교안보사령실이 도청당하는데도 미국의 입만 쳐다보거나 “나도는 정보가 다 사실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나오면 해외에서 한국을 어떻게 보겠는가. 수치스러움을 참고 견디는 것은 신사의 매너가 아니다. 그동안 신장된 한국의 국력과 문화가 한순간에 ‘비겁한 겁쟁이’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최대한 강력히 대응해 우리의 자주적인 의지를 보여야 한다. 대통령실이 털리는데도 말한마디 못하는 수준으로는 격랑의 시대를 헤쳐갈 수 없다. 도·감청 의혹이 제기되면 유럽의 정상들이 1차적으로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파악해보라. 우리의 문화와 품위는 우리가 지키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임순만 작가 · 전 국민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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