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읍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안건을 가결하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도읍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안건을 가결하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비상장 벤처기업의 복수의결권 주식 발행을 허용하는 내용의 벤처기업법 개정안의 국회 처리가 계속 지연되고 있다. 국내 벤처기업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빠른 법안 처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복수의결권이 결국 재벌·대기업에게까지 확대 적용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앞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달 23일 전체회의를 열고 복수의결권 도입을 골자로 하는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심사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심의를 다음 전체회의로 연기했다. 

복수의결권(차등의결권)은 하나의 주식에 대해 복수의 의결권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현행 상법은 ‘1주=1의결권’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벤처기업이 초기 자금 조달을 위해 신주를 발행할 경우 창업주의 지분이 희석돼 경영권 방어가 어려울 수 있다. 만약 창업주가 복수의 의결권이 부여된 지분을 통해 적은 납임금으로도 높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면, 외부 자본의 영향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혁신적인 경영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 

해외에서는 혁신적인 스타트업이 복수의결권을 통해 경영권을 방어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구글의 지주사 알파벳은 지난 2004년 상장 당시 주당 1개의 의결권을 가진 ‘클래스A’ 보통주와 10개의 의결권을 가진 ‘클래스B’ 보통주를 나눠 발행한 뒤 이 중 ‘클래스A’만 상장하고 ‘클래스B’는 창업자들이 나눠 가졌다. 덕분에 구글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10%가 겨우 넘는 지분율로 약 51%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복수의결권을 도입한 국내 기업도 있다. 지난 2021년 3월 12일 미국에 상장한 쿠팡은 상장 전 ‘클래스A’ 대비 29배의 의결권을 가진 ‘클래스B’ 주식을 발행한다는 내용의 신고서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했다. ‘클래스B’는 모두 쿠팡 창업주 김범석 의장에게 주어지는 만큼, 김 의장은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다만 김 의장이 해당 주식을 증여·상속할 경우 복수의결권은 무효화된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한국이 아닌 미국 상장을 선택한 이유가 복수의결권 때문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국내에서는 복수의결권 도입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기 때문. 실제 복수의결권 도입을 골자로 하는 벤처기업법 개정안은 지난 2020년 6월 처음 발의됐지만, 3년이 다 돼가도록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벤처기업법의 국회 처리가 늦어지는 이유는 복수의결권이 재벌·대기업의 경영 세습 및 지배력 강화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배진교·류호정·조정훈 의원 및 참여연대·경제개혁연대·금융정의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는 법사위 전체회의 하루 전인 지난달 22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 법사위는 국내 기업지배구조에 큰 후퇴를 가져올 수 있는 동 개정안의 심의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복수의결권주식은 지배주주의 사익추구 위험을 높이고 무능한 경영진의 교체를 어렵게 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며 “우리나라 기업들의 지배구조는 낙후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복수의결권주식 허용 자체만으로도 우리 시장에 대한 외부의 평가는 더 하락할 수 있다. 이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복수의결권이 도입되면 벤처기업을 넘어 대기업까지 확대 적용될 수 있다는 주장은 기우가 아니다. 앞서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은 지난 2021년 12월 ‘모범회사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는데, 이 법안은 기업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주식 발행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벤처기업법 개정안도 논의 끝에 내용이 일부 수정됐다. 재벌·대기업이 복수의결권을 경영권 승계에 악용하지 못하도록, 복수의결권이 부여된 주식을 발행한 기업이 대기업(공시대상기업집단)에 편입되거나, 복수의결권 주식을 상속·양도하는 경우 해당 주식이 보통주로 전환되도록 하는 내용이 추가된 것. 또한 벤처기업이 상장한 뒤에도 3년의 유예기간 뒤에는 복수의결권 주식이 보통주로 전환되도록 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여전히 복수의결권이 악용될 위험이 남아있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벤처기업법 개정안은 비상장 벤처기업이 상장할 경우 복수의결권주식이 보통주로 전환되도록 정하고 있지만, 실제 집행될지 여부는 확신하기 어렵다”며 “복수의결권주식이 보통주로 전환되는 시점은 급격한 지배권 변동을 수반하기 때문에, 상장 후 3년 일몰 시점에 다시 법 개정 요구가 분출할 것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어 “그렇다면 그 요구는 모든 기업에게 차별 없이 복수의결권주식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될 것이 뻔하다”며 “전경련이 벤처기업법 개정안 법사위 상정 시점에 즈음하여 복수의결권주식을 일반화하는 내용의 모범회사법 제정을 요구한 것을 보면 이런 우려를 단순히 ‘기우’로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반면 벤처기업계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우려가 지나치다는 입장이다. 혁신벤처단체협의회는 지난달 22일 성명을 내고 “(벤처기업법 개정안은) 창업자가 안정적인 경영권을 기반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가정신을 발휘할 수 있게 되어 벤처·스타트업이 대규모 투자를 받아 유니콘기업으로 성장 할 수 있는 혁신적인 제도”라며 “(복수의결권) 제도가 재벌 대기업 총수의 세습수단으로 악용 될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는 침소봉대일 수 있으며, 이러한 주장만으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또 다시 좌절되어 혁신을 통한 위기극복과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 등이 좌초되는 교각살우의 우가 생기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협의회는 이어 “혁신벤처업계도 복수의결권 제도가 재벌대기업 총수의 세습수단 등으로 확장되는 법률이 발의되거나 악용되는것을 그 누구보다 원치 않기 때문에, 향후 이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방지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벤처기업법 개정안은 3월 임시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다시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벤처업계의 숙원인 복수의결권 도입을 담은 벤처기업법 개정안이 시민단체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달 중 국회 문턱을 넘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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