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국은행
사진=한국은행

[이코리아] 지난해 폐기된 손상화폐가 에베레스트산 높이의 15배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한은이 폐기한 손상화폐는 4억1268만장으로 전년 대비 915만장(2.3%)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금액 기준으로는 2조6414억원으로 전년(2조423억원) 대비 5991억원(29.3%) 증가한 것이다. 

손상화폐는 한은에 환수된 화폐 중 훼손·오염 등으로 인해 사용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정된 것을 말한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폐기된 손상화폐를 낱장으로 길게 이으면 총 길이가 5만2,418km로 경부고속도로(415km)를 약 63회 왕복한 거리와 같다. 총 높이는 12만9,526m로 에베레스트산(8,849m)의 15배, 롯데월드타워(555m)의 233배에 달한다.

폐기된 손상화폐 규모가 늘어나면서 ‘현금 없는 사회’에 대한 논의도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현금 사용 비중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막대한 유통·발행비용을 감당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실제 한은이 지난해 4월 발간한 ‘2021년 지급결제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지급수단 중 현금 사용 비중(금액 기준)은 2019년 17.4%에서 2021년 14.6%로 3.8%포인트 감소했다. 이용 건수로 보면, 26.4%에서 21.6%로 4.8% 줄어들었다. 통상 비현금 지급수단의 비중이 90%가 넘는 사회를 ‘현금 없는 사회’라고 부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나라도 ‘현금 없는 사회’에 진입할 날이 머지않은 셈이다. 

현금 대신 사용 비중이 늘어난 것은 다양한 간편결제 수단이었다. 실제 모바일 카드는 같은 기간 3.8%에서 6.6%로 2.8%포인트 증가(금액 기준)했다. 건수 기준으로 보면 3.8%에서 9.0%로 5.2%포인트 늘어나 증가폭이 더 컸다. 반면 대표적 비현금 지급수단인 신용카드는 금액 기준 4.3%포인트(53.8%→49.5%), 건수 기준 0.3%포인트(43.7%→43.4%) 감소했다.

◇ 현금 없는 사회, 금융접근성은?

해외 주요국들도 이미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을 겪고 있다. 스웨덴은 이미 지난 2018년 현금 사용 비중이 13%까지 감소한 데다, 현금 결제를 거부하는 사례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영국과 뉴질랜드도 2018년 현금 사용 비중이 28%, 31%로 한국(26.4%)과 비슷한 수준이다. 편리한 간편결제수단이 발전하고 있는 데다, 코로나19 이후 많은 사람들이 비대면 결제에 익숙해지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편의성’ 때문이 시작된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금 의존도가 높은 고령층이나 장애인, 카드를 발급받기 어려운 미성년자 등은 현금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줄어들수록 다양한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 비현금 지급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금융인프라가 부족한 벽지지역 거주자들도 현금 없는 사회가 달갑지만은 않다. 

게다가 대규모 정전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할 경우, ‘현금 없는 사회’에서는 아예 모든 거래가 불가능해질 위험도 있다. 특히, 소수의 민간기업이 지급결제시장을 장악하게 되면 이러한 위험은 더욱 커질 수 있으며, 중앙은행이 통화정책 효과도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카카오 먹통 사태가 수많은 자영업자와 소비자에게 끼친 피해를 고려하면,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에 긍정적인 부분만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 CBDC, ‘현금 없는 사회’ 부작용 해답 될까?

일각에서는 금융접근성 하락, 독과점의 위험, 중앙은행 기능 약화 등 현금 없는 사회가 초래할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CBDC’(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를 주목하고 있다. 현정환 동국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지난 2021년 발표한 ‘유럽 3국의 현금없는 사회에 대한 법제도적 대응 방안과 우리나라에의 시사점’ 논문에서 “현금없는 사회가 빠르게 진행되어 현금이 지급수단으로서 실질적인 지위를 상실하는 상황이 도래할 경우 소매결제에서 중앙은행화폐가 결제자산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소액결제용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발행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중앙은행의 대응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해외 주요국 중앙은행은 앞다퉈 CBDC 도입에 나서는 추세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지난 2020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65개 중앙은행 중 86%가 CBDC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CBDC 도입 관련 실험 및 검증 단계에 있다는 응답도 60%에 달했다. 

중국은 CBDC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국가 중 하나다. 중국 인민은행은 이미 지난 2014년부터 ‘디지털 위안화’(e-CNY)를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두 차례 이상의 시범 운영을 거쳐 지난해 말까지 약 136억위안(약 2조5000억원) 이상을 유통시켰다. 스웨덴 중앙은행도 지난 2017년 e-크로나(Krona)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지난해 2단계 테스트를 마치고 발행 준비를 완료한 상태다. 

한국은행도 CBDC 개발에 나선 상태다. 한은은 지난 2021년 8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CBDC 모의실험 연구사업을 진행했는데, 이를 통해 분산원장기반 CBDC 모의시스템의 기본 기능(제조, 발행, 유통 등) 및 확장 기능(오프라인 거래, 디지털자산 거래, 정책지원 업무 등)에 대한 구현 가능성을 점검했다.

한은은 “사업 수행 결과, 실험한 전체 기능이 정상적으로 동작하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오프라인 CBDC 기능이 온라인 CBDC와 독립적으로 운영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했다”면서도 “피크타임의 여타 전자지급서비스 수준의 실시간 대량 거래 처리를 위해서는 응답대기시간을 단축시킬 필요가 있으며, 신기술을 현 시점에서 실제 시스템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는 점도 확인했다”고 사업 성과를 설명했다. 

한편,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 3일 열린 ‘범금융 신년인사회’에서 “CBDC에 대한 연구·개발을 비롯해 디지털 플랫폼 및 새로운 금융 인프라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지급결제시스템 개선 및 안전성 제고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눈앞으로 다가온 ‘현금 없는 사회’가 불러올 다양한 문제에 CBDC가 해답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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