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을 보유 및 추진하는 국가들도 재생에너지 전력 생산 비중 확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비교 국가 중 재생에너지 전력 생산 비중이 20% 미만인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자료=그린피스
원전을 보유 및 추진하는 국가들도 재생에너지 전력 생산 비중 확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비교 국가 중 재생에너지 전력 생산 비중이 20% 미만인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자료=그린피스

[이코리아] 유럽연합(EU) 의회가 5일(현지시간) 녹색분류체계(Green Taxonomy·그린 택소노미)에 천연가스와 원전을 포함시키는 것을 확정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외신에 따르면 EU의회는 이날 본회의를 열고 지난달 유럽의회 경제통화위원회·환경보건식품안전위원회가 원전과 천연가스를 택소노미에 포함시키면 안 된다며 채택한 결의안에 대해 표결을 진행했다. 그 결과 투표 참석 의원 639명 중 328명이 EU의 가스와 원전 제안을 저지하려는 동의안에 반대하면서 해당 결의안은 부결됐고, 원전과 천연가스가  포함된 초안대로 EU택소노미가 최종 확정된 것이다.

그간 유럽에선 원전과 천연가스를 ‘친환경 에너지’로 인정할지를 두고 각국 간에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왔다.

폴란드와 불가리아를 포함한 국가들은 오염이 더 심한 석탄을 단계적으로 없애고 천연가스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텍소노미 로비를 벌여왔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덴마크와 룩셈부르크와 같은 국가들은 화석 연료를 ‘그린’으로 표기하는 것은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가운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천연가스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지속적인 의존을 의미한다며 반대 의견이 형성됐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EU는 원전과 천연가스를 포함한 EU택소노미 초안을 결국 채택했다.

다만 녹색 에너지로 분류된 원자력과 천연가스가 모든 상황에 포함될 수 있는 에너지원은 아니다. 

천연가스 발전의 경우, 전기를 생산하거나 많은 집을 동시에 난방 또는 냉방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지속 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다른 용도는 제외될 수 있다. 1kWh 발전량 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70g까지 인위적으로 낮춰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붙었으며, 특정 상황에 따라 2030년 또는 2035년까지만 승인된다.

원자력은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사고 저항성 핵연료 사용과 핵 폐기물 매립장 확보라는 단서 조항이 붙었다. 가장 진보된 기술을 사용하는 새 원자력 발전소와 기존 발전소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수정된 원전은 2040년 또는 2045년까지 승인될 수 있다. 

산업 분야 단체들은 이번 EU의 투표결과를 환영했다. 독일 지역 유틸리티협회 VKU의 잉베르트 리빙 전무이사는 "기후 목표 달성을 위한 가교로서 천연가스의 역할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라고 평가했다.

에두아르드 헤거 슬로바키아 총리는 이번 투표 결과가 에너지 안보와 배출량 감축 목표에 도움이 된다며 “우리는 2050년까지 기후 중립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의회의 결정에 대한 비판도 쏟아지고 있다. 

EU 회원국 중 이미 재생에너지 전력 비중을 30-40% 이상 달성한 나라들이 많으며, 독일의 경우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전력을 80%까지 높이기 위해 법 개정을 추진 중일 정도로 적극적이다.

원자력 발전에 반대하고 가스를 그린으로 표기하는 것에 대해 경고해 온 룩셈부르크와 오스트리아는 법정에서 이 법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레오노레 게웨슬러 오스트리아 기후장관은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야심도, 지식 기반도 아니며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고 무책임한 것 이상"이라고 지적했다. 

덴마크 연기금인 아카데미커펜션의 최고투자책임자(CFO)인 안데르스 셸데는 "이는 전 세계에 기후행동에 대한 EU의 지도적 위치를 훼손할 수 있는 좋지 않은 신호"라고 말했다.

토마스 리히터 독일 투자산업협회 최고경영자(CEO)는 “원자력과 천연가스는 정치적으로도, 또 과학적으로도 논란이 있기 때문에 유럽의회가 택소노미에 포함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환경단체들은 법적 이의를 제기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EU의 움직임을 비판했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유럽의회가 그린 택소노미에 원자력 발전과 가스 발전이 지속가능한 재원을 확보하도록 마련한 최종안에 찬성한 것은 우리와 미래 세대의 안전을 최우선시한다는 유럽연합과 의회의 원칙을 스스로 위배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린피스는 이번 결정에 대해 유럽집행위원회에 공식 내부 검토 요청을 제출할 예정이며, 충분한 답변을 받지 못할 경우 유럽 사법 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해 법적으로 대응할 예정이다.

유럽의회가 원전과 천연가스를 녹색에너지로 포함시키기로 했지만 EU가 내건 조건이 까다로워 원전과 가스발전에 활발한 투자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게 에너지업계의 의견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유럽의회가 내건 조건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낮추려면 이미 여러 번 상용화에 실패한 탄소포집저장 장치를 달아야 하거나 다른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경제성이 낮아진다. 여기에 더해 유럽 배출권 거래제는 발전 부문의 탄소 배출권을 100% 유상할당하기 때문에 탄소 배출권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고 저항성 핵연료는 아직 상용화 되지 않았고 성공 여부도 미지수다. 여기에 더해 핵폐기물 매립장 확보는 아주 많은 장애물이 있는 문제여서 해결이 어려울 수 있고 사회적 합의가 된다고 해도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번 EU 택소노미의 결과는 우리 정부의 택소노미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올해 1월 초 환경부는 EU의 논의 동향 등을 지속적으로 살펴보는 한편 기준의 내용과 이유에 대해서도 면밀히 검토할 계획이며, 에너지 등 국내 사정을 고려해 검토와 논의를 지속적으로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윤석열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기로 했고, 환경부는 원전을 포함한 K택소노미 수정안을 오는 8월 발표할 예정이다.

김지석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전문위원은 이번 EU 택소노미에 대해 “우리나라는 이번 택소노미 결정과는 별개로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안보 강화는 물론 국내 수출기업의 RE100 대응을 위해 필수적인 태양광,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의 빠른 확대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이어 “원자력은 2021년 국내 발전량의 27.4%를 차지했는데 이는 전 세계 원자력 발전 비중 9.9%의 세 배 수준이다. 이미 높은 원전 비중을 더 높이려고 한다면 EU 그린 택소노미 기준에서 제시된 사고 저항성 핵연료 사용과 고준위 핵폐기물 저장시설 확보 등 안전 기준을 먼저 강화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며 “이번 결정으로 유럽에서 원자력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처럼 해석하거나 홍보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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