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전 국민일보 편집인
임순만 전 국민일보 편집인

[이코리아] 해마다 6월 25일이 찾아오면 많은 사람이 트라우마를 겪는다. 같은 민족이 3년간에 걸쳐 싸운 전쟁의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정은 이 땅에 하나도 없다. 72년이 지난 지금도 남과 북은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남한 측은 서명하지도 않은 휴전협정 상태로 대치 중이다. 허리 중간에 철조망을 두르고 있는 국토는 얼마나 아픈가. 

6.25 전쟁으로 남북한은 엄청난 물적, 인적 피해를 보았다. 주택과 학교, 공공시설, 도로, 철도, 교량 등 기반시설과 공장 등 각종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피해는 △한국군 사상 및 실종자 62만 명 △북한군 사상 및 실종자 64만 명 △유엔군 사상자 15만 명 △중공군 사상 및 실종자 97만 명 △한국 측 민간인 사망, 부상, 실종자 99만 명 △북한 측 민간인 사망, 부상, 실종자 150만 명이며, 남북한 이산가족이 1,000만 명에 달한다. 전쟁 전 남한보다 월등했던 북한의 산업시설과 주택, 건물, 기반시설은 전쟁 중에 대부분 파괴되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

한국 측을 도와 참전한 연합군은 이 전쟁을 이역만리에서 빚어진 어정쩡한 충돌로 기억하고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희망도 끝도 없이 아직도 여전히 정전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제사회 일부에서는 이 전쟁을 ‘잊혀진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전이 불명예와 상처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전쟁사에 남을 여러 기념비적인 전투가 있었고, 조국을 위해 몸 바친 이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다. 한국인들에게는 이 전쟁이 남긴 시련과 영예를 이어받아 통일을 성취해 나가야 할 일종의 의무가 남아있다. 

6.25는 잘못된 계산에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북한 인민군 7개 사단(이중 상당수는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정예군이었음)이 군사분계선을 넘은 지 나흘이 지난 1950년 6월 29일 오후 미군 파병을 앞두고 해리 투르먼 미국 대통령은 처음으로 출입기자단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전쟁에 돌입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아니라고 대답했다. 다른 기자가 “그러면 유엔 주도하에 경찰 업무를 하는 것이냐”고 묻자 “그렇다. 바로 그런 상황이다.”라고 답했다. 소련과의 대립이 확대되는 것을 피하고자 모호한 태도를 고수한 것이다. 이미 6개월 전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미국의 아시아방어선에서 남한을 제외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터였다.

스탈린 소련 공산당서기장은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했다. 전쟁 발발 4개월 후 마오쩌둥 중국주석은 수십만 명의 중공군을 전쟁터에 보내면서 중공군을 ‘지원군’이라고 말장난을 했다. 마오는 1년 전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군의 정신이 미군의 우수한 무기를 능가할 것이라고 과신했다. 북한의 김일성 인민군사령관은 3일 만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오판했다. 

이승만 한국 대통령은 국군이 전투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계속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이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은 실천용이라기보다는 북진에 환호하는 지지자들을 향한 국내 여론용이라는 측면이 짙다. 그의 북진 주장으로 인해 새로운 전쟁을 우려한 미군정은 1949년 군사고문단만을 남겨놓고 남한에서 퇴각할 당시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구식 2.36인치 바주카포를 비롯한 소수의 방어용 재래식 무기만을 남겨놓고 모든 신식 무기를 갖고 철수했다. KBS 다큐 <한국전쟁 10부작> 중 제3부 <폭풍> 

 이는 김일성이 남침 당시 오판한 하나의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 이후에도 이 대통령은 북진을 계속 주장했고, 정전협정 당시 한국은 협정당사자의 자격에서 배제됐다.

한국전 관련 당사국들이 모두 이렇게 말장난과 계산착오로 느슨하게 시작한 전쟁은 3년간 계속되는 착오를 거듭하며 한반도에 깊은 상처를 남긴 채 미결의 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전의 초기의 양상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당시 가뭄으로 인해 밀려있던 고향의 모내기를 위해 전국적으로 주말 휴가에 들어갔던 한국군도 그렇고, 2차대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예비군에 편입되어 생업에 종사하다가 느닷없이 소집된 미군들에게도 훈련과 통솔력이 부족한 상태였다. 

미군의 실수는 무엇보다 먼저 한국을 몰랐다는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태평양 전쟁서 항복한 일본이 한국에서 물러가고 미군정이 한반도에 들어올 때 미군은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한국인맥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미군은 물러가는 일본의 말을 들었다. 한국에 도착한 미군은 한국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한국인들이 일본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일제 치하가 얼마나 잔혹했는지 모르는 미군은 일본 경찰력으로 치안을 유지했다. 한반도가 둘로 나뉜 것만으로도 통탄할 일인데, 조국의 운명을 또 다른 나라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는 한국인의 자존심을 미국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시아에 대해 무지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최고사령관은 한국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별로 보여주지 않았다. 한국전쟁 기간 그는 한국에서 밤을 지낸 날이 거의 없다. 전용기를 타고 일본으로 날아갔던 그는 필리핀에서는 영웅과 같은 존재였다. 맥아더는 1942년 초 마누엘 케손 필리핀 대통령으로부터 거액의 사례금을 받고 마닐라에 영향력 있는 후원자가 되기로 약속했으며, 미군이 필리핀을 떠날 때도 케손으로부터 50만 달러를 받았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 콜디스트 윈터> 568쪽

 케손은 미국 고위 장교들에게 64만 달러를 송금했는데 이 중 50만 달러가 맥아더의 몫이었다고 한다. 맥아더는 북한군의 호전성이나 장세스를 몰아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중국인들의 기질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중국군의 개입을 걱정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그는 전쟁 전부터 중국이 참전할 리 없으며 혹 참전한다면 역사상 최대의 참사를 겪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10월 20일 미군 제1기병사단 5연대가 평양에 입성한 직후 미군을 중국 접경지역으로 보내지 말라는 미 합동참모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중국 국경인 압록강까지 북진을 명령했다. 그는 압록강 너머에 있는 중공군의 규모가 트루먼 행정부 고위관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작다고 확신했다. 워싱턴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9월 15일 세계 전쟁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에서 승리한 맥아더는 미국과 한국에서 거의 신적인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워싱턴 고위관리들은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한 후 운산으로 진격하는 것을 보고 그때가 중국과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맥아더를 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압록강으로의 진격을 명령한 맥아더는 한국의 지형을 잘 몰랐다. 그런 상태에서 맥아더는 미군을 중국 접경지역으로 보내지 말라는 미 합동참모부의 지시를 무시했다. 같은 책 28쪽

당시 중공군은 한반도에 주둔해 한국군과 유엔군 부대가 북쪽으로 더 깊숙이 진격해 보급선이 길게 이어지고 북진에 어려움을 겪기를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30만이 넘는 중공군이 압록강 너머에서 진을 치고 있다는 미8군 사령부의 정보를 신뢰하지 않았다. 마오 군대는 1만 2,000km에 달하는 대장정에 이어 국공내전을 통해 매복과 유인에 뛰어난 산악 전술을 갖추고 있었으나 미8군 사령부는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오판 하에 한국에 새로 보급된 105mm와 150mm 포탄이 너무 많다고 포탄을 실은 함선 6척을 한국에서 하와이로 반환하라고 명령할 정도였다. 맥아더는 11월 6일 도쿄에서 한국전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11월27일부터 17일간 펼쳐진 중공군과의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는 혹한을 견디지 못했다. 미군은 이 전투에서 6,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군 장비를 버린 채 채 흥남으로 후퇴하는 참혹한 실패를 기록했다. 모택동은 이 전투에서 자신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군대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피를 요구하는 인해전술을 시도함으로써 인명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심었다.

이런 판단과 작전 착오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은 주요 고비 때마다 훈련되지 않은 한국군의 활약이 눈부셨던 전쟁으로도 꼽힌다. 춘천 6사단의 분투는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국군 6사단과 춘천 시민들은 북한군 2사단에 맞서 남하하는 북한군의 발목을 3일 동안이나 묶어놓았다. 춘천 전투에서 6사단 장병들이 시간을 벌어줌으로써 국군은 수원 부근에서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군 지휘관이 지프를 타고 소양강 다리를 지날 때 다리 위에 즐비하게 널린 인민군과 국군의 시신 때문에 운전병이 제대로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피난을 가는 대신 군인들에게 포탄을 날라준다거나 밥을 해서 갖다준 시민들, 참호를 구축하는데 손을 보탠 젊은 학생들, 제사공장 노동자들…, 그들이 없었더라면 김일성의 계획대로 남한은 3일 만에 점령당했을 것이다.

전황이 급박해 한국에서는 학도병들을 신병을 받아도 이들을 제대로 훈련 시킬 시간이 없었다. 겨우 3~4시간 동안 기본적인 소총 사격 훈련과 수류탄 투척 요령만 습득한 뒤 곧바로 전선으로 투입된 신병들은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나면 30~40퍼센트가 사라졌다. 나중에는 분대장이 자신에게 배속된 분대원의 얼굴과 이름도 모른 채 전투에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구 북방 22km 지점의 칠곡군 다부동에서는 고지를 10여 차례가 뺏고 빼앗기는 55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이 전투에서는 북한군 2만 4,000여명, 국군과 유엔군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 전투에 소련제 T-34 탱크를 육탄으로 막아낸 한국의 무명용사들이 없었다면 낙동강 전선은 무너졌을 것이다. 

서울을 수복한 후 10월 1일 38선을 가장 먼저 넘은 것도 국군 3사단이었고, 그달 20일 유엔군이 미군 제1기병사단 5연대가 평양을 점령했다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도, 한국 보병부대는 이미 하루 전에 평양에 입성한 상태였다. 초반의 열세를 만회하자 한국군의 사기는 이 전쟁에 참여한 모든 군대를 앞섰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정일권은 훗날 “미군과 한국군과의 경쟁에서 항상 한국군이 앞서갔기 때문에 미군 장교들이 한국군의 사기에 항상 감탄을 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전쟁 후 남한과 북한은 활발한 재건에 돌입했다. 완전한 전체주의 사회로 돌입한 북한의 경제부흥은 오히려 한국보다 빨라 보였다. 그러나 김일성 일인 체제에서의 경제부흥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늘의 북한은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세계 2차대전과 냉전 이후 국제사회에서 가장 돋보이는 성과를 일구고 있다. 앞으로 한반도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남한에 달려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

2)KBS 다큐 <한국전쟁 10부작> 중 제3부 <폭풍> 

3)데이비드 핼버스탬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 콜디스트 윈터> 568쪽

4)같은 책 28쪽

임순만 /작가 · 전 국민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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