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남한산성

허송세월하는 나는 봄이면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논다. 봄비에 씻긴 성벽이 물오르는 숲 사이로 뻗어 계곡을 건너고 능선 위로 굽이쳤다. 먼 성벽이 하늘에 닿아서 선명했고, 성 안에 봄빛이 자글거렸다. 나는 만날 놀았다.

옛터가 먼 병자년의 겨울을 흔들어 깨워, 나는 세계악에 짓밟히는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서 무참하였다.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있는 동안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김훈 ‘남한산성’ 서문 중에서

봄이 무르익어 가고 여름이 다가오면 남한산성 일원에는 아카시꽃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마치 깊은 치욕을 가리기라도 하듯. ⓒ유성문

치욕을 일깨우는 봄빛을 만나러 가는 길을 나는 모란시장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 장 구경이라지만, 모란시장에서 나는 그놈의 견공들 때문에 자꾸만 쭈뼛거린다. 뙤약볕에 나앉은 그들의 등 위로 떨어지는 철망의 그림자는 음산하다. 불현듯 언젠가 모 방송사와 B·B(브리지도 바르도)가 벌였던 난데없는 ‘개고기 논쟁’이 떠오른다. 그 논쟁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남의 나라 음식문화를 자기 잣대로 왈가왈부한 육체파 여배우는 그렇다고 치고, 그것을 ‘프랑스인도 개고기를 먹느냐 않느냐’로 몰고 간 것은 더욱 가관이라 할만 했다. 아무튼 개고기를 먹는 것을 이해는 하되,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나는 철망 안의 예비 개고기들에게 묻는다. 과연 누가 맞느냐고. 개들은 말이 없다.

예전에 남한산성 길을 가려면 1637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당한 치욕이야 어떠하든 공원입장료 2000원을 떼이지 않으려고 허겁지겁 길을 넘어야 했다. 30분 안에 통과해야만 먼저 낸 입장료를 되돌려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길옆에 나앉은 동문 정도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문화재였다. 더는 곁눈 팔 겨를조차 없이 반대편 톨게이트에 도달하면 비로소 ‘단순통과자’로 분류되고, 돈을 돌려받았다. 돈은 돌려받았으되, 남한산성에 들어앉은 그 깊은 치욕의 역사를 반추할 수 있는 기회는 놓쳐버렸다. 톨게이트도 폐쇄된 지금, 행자는 남한산성을 넘다 새삼 ‘치욕의 역사’를 곱씹어볼 수 있을 것인가.

죽을 길과 살 길은 모두 성 밖에 있다. 성 안에는 죽을 길도 없고 살 길도 없다. ⓒ유성문

‘너희가 살고 싶으면 성문을 열고 나와 투항해서 황제의 명을 받으라. 너희가 죽고 싶거든 성문을 열고 나와 결전을 벌여 황천의 명을 받으라!’

이것이 남한산성 안으로 들여보낸 청나라 군대의 투항권유서였다. 이 문서는 그 삼엄하고 정연한 현실주의적 어법으로 읽는 사람을 전율케 한다. 죽을 길과 살 길은 모두 성문 밖에 있다! 살 길은 황제의 명을 받는 것이고 죽을 길은 황천의 명을 받는 것이다! 성 안에는 죽을 길도 없고 살 길도 없다! 성 안에서 죽을 길과 살 길은 포개져 있어서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정당한 자존의 길이 곧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김훈 ‘자전거여행·2’ 중에서

1636년 음력 12월, 청의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눈보라를 몰고 서울로 진격해왔다. 병자호란이었다. 정묘호란을 겪은 지 불과 9년 만이다. 방비를 갖추지 못한 채 척화만을 내세우던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때처럼 다시 강화도로 파천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 수밖에 없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 동안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말과 말의 싸움, 삶과 죽음의 등치에 관한 참담하고 고통스런 낱낱의 기록이다.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2004년 5월 문을 연 분원리의 얼굴박물관은 원로 연극인 김정옥 씨가 40여 년간 수집한 인간의 표정들을 보여준다. ⓒ유성문

가까스로 남한산성을 넘어 간 행자는 자못 마음을 놓고 퇴촌을 돌아 분원리 쯤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붕어찜 한 접시에 땀을 빼기 십상이다. 그러나 길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앵자봉 아래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다. 조선 말 젊은 유신(儒臣)들은 천진암에 은거하며 서학에 경도되었다. 강 건너 능내마을에 살던 다산 정약용의 형제들을 비롯한 일단의 젊은 지식인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으나 핍박받았고, 분열되었으며, 마침내 일부는 순교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는 사이 천진암의 승려들은 단지 그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참수당하고 절은 폐사되었다. 그 위에 지금 한국 천주교회는 무려 100년에 걸친 대대적인 성역화작업을 벌이고 있다.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이 있는 원댕이마을의 나눔의 집은 또 어떤가. 나눔의 집은 하나둘 스러져가는 위안부 할머니들로 해서 이제 바라보기조차 안쓰럽다. 평생 씻기 힘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그들이건만, 잘난 후손들은 그 상처를 씻어주기는커녕 그 위에 소금을 뿌려대기 일쑤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슬픔을 감싸줄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모성일 뿐이다. 그래서 지월리의 허난설헌 무덤은 더욱 구슬프다. 조선에서, 여자로, 그것도 한 남자의 지어미로 태어난 것을 통탄했던 그녀의 무덤은 한쪽 어깻죽지로 자신보다 먼저 떠난 두 아이의 무덤을 그러안고 있다. 허난설헌의 무덤이 그러안고 있는 것은 자식들의 무덤만이 아니다. 유택 앞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너머 원댕이마을처럼 현실에서 패퇴한 남자들 뒤에서 치욕으로 스러지는 이 땅 여성들의 깊은 한숨까지도 그렇게 말없이 지켜보는 것이다. 거기서 겨우 위안의 실낱을 붙잡으려는 나는, 남자라서 부끄럽다.

경기 광주 초월면 지월리의 허난설헌무덤. 고속도로의 소음을 마주한 가파른 언덕바지에서 먼저 떠난 두 아이의 무덤을 그러안고 있다. ⓒ유성문

이상향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곳이 어디든 갈 수 없는 길과 나아가야 할 길은 결국 포개져 있다. 치욕의 현실 위에서 삶의 길은 열리는 것이며, 치욕 역시 삶의 일부라고 ‘남한산성’은 가르쳐준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삶이든 역사든 오롯이 온전할 수만은 없는 것이며,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이겨냈을 때 비로소 길을 열린다고 믿는 것이다.

 

<필자 약력>

-여행작가

-편집회사 투레 대표

-한국기록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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