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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인문학] 통유(通幽①) 잔 수에 강하면 진다
  • 김태관
  • 승인 2019.01.1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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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배움은 날마다 더하는 것이고, 도는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다. 학문과 도는 차원이 다르다. 도에 이르려면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야 한다. 얻으려면 주고, 가지려면 버리고, 이기려면 져주는 오묘한 역설의 세계, ‘통유’가 그 입구다.

 

마주 달리는 두 직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기하학에 말하는 평행선의 정의이다. 그런데 평행선은 과연 만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기하의 세계에서 평행선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회화 즉 그림의 세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 평행선은 얼마든지 만난다.

 

이는 철도의 레일을 떠올려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평행으로 놓인 두 레일은 나란히 달리다가,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면서 결국에는 만나서 하나의 점이 된다. 평행선이 만나는 지점, 그곳을 회화에서는 소실점(消失點)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소실점은 평행선이 끝나는 종착역일까? 그렇지 않다. 평행선이 끝나는 곳, 즉 소실점을 지나면서부터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기하의 세계가 로직(logic)의 세계라면, 회화의 세계는 매직(magic)의 세계다. 논리를 초월하는 세계가 소실점에서부터 시작된다. 평면에서는 마주 달리던 두 직선이 소실점에서 만나 차원이 다른 입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실점은 끝이자 시작이다. 소실점에 서면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심오한 신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통유(通幽)의 세계다.

 

위기구품의 6번째인 품계인 ‘통유’는 “바둑의 그윽한 경지를 안다”는 뜻이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깊고도 오묘한 승부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단계로, 비유하자면 소실점을 지나는 것과 같다. 곧 배우고 쌓는 단계를 지나, 버리고 비우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는 것에 눈을 뜨게 된다. “정석을 알되 정석을 잊어라”는 바둑 격언처럼 프로 6단의 별칭인 통유에서부터는 이제까지의 문법과는 정반대의 국면이 펼쳐진다. 채움을 지나서 비움의 세계로 들어가는 패러다임 대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바둑의 진경(眞境)이라 할 그 세계는 노력이 아니라 깨달음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더 높은 차원으로 비상하려면 지금까지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 통유에서부터는 실력이 날마다 꾸준히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문득 껑충 도약한다. 바둑을 잘 뒀다는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기화(棋話)에서 통유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를 엿보도록 하자.

 

무학대사와 이성계는 수많은 일화들을 야사로 남겼다. 대개가 왕이 될 이성계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들인데, 바둑이야기도 그런 종류다. 두 사람은 바둑실력이 호적수여서 틈나면 한 수 겨뤘다고 한다. 그런데 수읽기는 분명 무학대사가 강한데 승리는 언제나 이성계의 편이었다. 무학은 잔 수에 밝아 부분적인 묘수를 잘 냈지만, 이성계는 부분보다는 대세에 밝아 전체의 형세를 꿰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둑을 지고 나면 무학대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도 하여라. 기막힌 묘수를 두는데도 어째서 맨 날 지기만 하는고.”

그러면 이성계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좌정관천(坐井觀天)이 그런 것이오. 우물 속에서 하늘이 제대로 보이겠소? 대사는 나무를 보지만 나는 숲을 본다오.”

무학대사의 바둑은 잔 수에만 밝지 대세에는 어둡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이성계의 뛰어난 대세관을 보여주는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길을 가다가 웬 농부가 산 밑에다 집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풍수지리에 능통한 무학대사가 유심히 터를 살펴보더니 무릎을 쳤다. 농부의 집터는 보기 드문 명당으로,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면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향해 말했다.

“저기 집을 짓고 있는 농부는 3년 안에 거부가 될 것입니다. 지세를 짚어 보니 저곳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들어설 길지(吉地)입니다.”

그런데 이성계는 무학대사와는 정반대의 의견을 냈다.

“글쎄요. 내가 보기에는 아니올시다. 저곳은 몇 년 후에 필시 폐허가 될 것이오.”

“아니, 소승의 눈을 얕보시는 겁니까?”

“허허,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요.”

풍수지리에 누구보다 밝은 무학대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소승과 내기를 합시다. 3년 후 저곳에 고래등 같은 집이 들어서는지, 아니면 폐가가 들어서는지.”

“좋소. 무엇을 걸어도 내 차지가 될 거요.”

두 사람은 서로 장담하며 다시 길을 떠났다.

 

그로부터 3년 후 무학대사와 이성계는 똑같은 곳을 지나가게 됐다. 그런데 이게 어이 된 일인가. 농부가 집을 지었던 곳에는 다 쓰러져 가는 폐가가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무학대사가 기가 차서 탄식을 했다.

“도대체 이 무슨 변고인고. 저 집에 살았던 사람은 거부가 됐을 텐데 어찌 하여 폐가로 변했는가.”

그 소리를 들은 이성계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보시오, 대사. 내가 전에 바둑을 두면서 대사는 잔 수에만 강하고 대세에는 약하다고 하지 않았소. 저 집이 저렇게 될 줄 몰랐던 것은 그 때문이오.”

“아니, 저 집과 바둑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허허, 생각을 좀 해보시오. 저곳이 폐허가 된 것은 대사의 풍수지리가 정확하게 맞았기 때문이라오. 대사의 예상대로 저 집 주인은 큰 부자가 되었을 것이오. 그러나 여기는 외딴 산골이지 않소. 거부가 된 사람이 이런 골짜기에서 살 리가 있겠소. 틀림없이 대처로 나아가 떵떵거리며 살겠지요. 그래서 나는 이곳이 폐허로 변할 줄 알았던 것이오.”

 

무학대사는 비로소 자신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집 주인이 부자가 되는 것은 맞혔지만, 그 부자가 그곳을 떠나는 것까지는 미처 내다보지 못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허리 굽혀 말했다.

“바둑도 풍수지리도 소승이 한 수 아래입니다. 참으로 일국의 군주다운 안목을 가지셨습니다.”

 

무학대사는 풍수지리를 알았고, 이성계는 사람을 알았다. 무학은 배운 대로만 보았고, 이성계는 그 다음을 보았다. 집터가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명당임을 아는 것까지가 풍수지리의 단계다. 그 부자가 그곳을 떠날 것을 내다보는 것은 풍수지리를 넘어선 또 다른 단계다. 배움이라는 하나의 단계가 정점에 이르면 또 다른 경지가 열리는 법이다. 이성계는 배움의 세계를 지난 또 다른 경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바둑으로 치면 통유의 경지라고 이를 수 있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넘어 또 다른 사유(思惟)의 지평이 열리는 지점이 바로 통유인 것이다. 통유에 이르면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또 다른 깊고 그윽한 세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노자는 “배움이란 날마다 더하는 것이요, 도(道)란 날마다 덜어내는 것(爲學日益, 爲道日損)”이라고 했다. 통유는 배움을 넘어 도의 경지로 들어가는 이정표와도 같다. 배우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고 비우는 역설의 세계는 그윽한 도(道)의 경지와 이어져 있다.

 

예전에 바둑황제로 군림했던 이창호 9단은 자서전을 펴내면서 ‘부득탐승(不得貪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기려는 욕심을 버려라”는 뜻으로 ‘바둑십계명’이라는 위기십결(圍棋十訣) 중의 하나다. 이기고자 하면 이기려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는 바둑뿐만이 아니라 모든 승부에서 통하는 심오한 이치이기도 하다.

 

통유의 고수는 이기기 위해 이기려는 마음을 비운다. 그리고 얻기 위해 주고, 당기기 위해 늦추고, 이기기 위해 져 줄 줄을 안다. 줘야 취하고, 져야 이기는 승부의 오묘한 이치를 깨우친 까닭이다. 노자 <도덕경> 36장은 “장차 빼앗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주고, 장차 약하게 만들고자 하면 먼저 강하게 해주고, 장차 멸망시키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흥하게 해줘야 한다”고 가르친다. 통유를 넘어 입신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터득해야 할 승부의 묘리이다.

 

마지막으로 올해는 기해년 황금돼지해이니, 지고도 이기는 통유의 수법을 돼지 이야기를 통해 구경해 보자. 어느 소설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각색해 본 것이다.

 

“어렸을 때 동네에서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를 구경한 적이 있다. 그까짓 돼지를 끌고 가는 게 무슨 구경거리냐 하겠지만 나름대로 상당히 흥미진진한 광경이었다. 돼지를 줄로 묶어 트럭에 실으려는데, 아무리 미련한 짐승이라도 저 죽는 줄은 알아서 장정들 몇이서 줄을 끌어당겼지만 꿈쩍도 안했다. 돼지도 힘을 쓰면 황소 못지않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힘은 돼지가 센지 몰라도 지혜는 인간이 한 수 위였다. 장정들은 방향을 180도 바꿔 트럭 반대편 쪽으로 줄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돼지가 버티면 못 이기는 체하고 줄을 슬슬 늦췄다.

그랬더니 기막힌 상황이 연출되었다. 돼지는 안 끌려가려고 버텼는데, 슬슬 끌려가고 있었다. 돼지가 뒷걸음질을 칠수록 뒤쪽에 있는 트럭에 가까워졌다. 결국 돼지는 제 뜻대로 했지만, 결과는 인간 뜻대로였다.

돼지는 자기가 이긴 줄 알았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돼지는 이기고도 졌고, 인간은 지고도 이겼다.”

 

세상의 이치는 때로 역설적이어서 상식을 송두리째 뒤집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인가를 추구하면 대개 본능을 거슬러야 한다. 져야 이기고, 낮춰야 높아지고, 버려야 얻을 수 있고,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깨우침이 그렇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는 말처럼 하나의 세상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배우고 익히는 세계가 정점에 달하면 버리고 비우는 세계가 시작된다. 평행선이 만나는 소실점 너머의 세계다. 통유에 이른 사람은 그 지극한 경지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날마다 더해왔던 것을 이제부터는 날마다 비워간다.

져야 이기고, 비워야 채워지는 그윽한 경지가 있다. 입신이라고 일컫는 그 신묘한 경지를 향해 날아오르고 싶은가? 이제까지의 문법을 버려라. 익숙했던 것들과 결별하라. 상식과 본능이라는 견고한 틀을 깨어 부수라.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김태관  kntimes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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