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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에서 남쪽으로 약 250㎞ 떨어진 와디 아라바 사막의 가장자리엔 유난히 좁은 협곡이 많다. ‘시크’라고 불리는 이 협곡들은 급류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5m가 채 안 되는 폭에 높이는 수백m에 이르러 깎아지른 듯하다.

미로 같이 좁은 협곡 사이를 한참 들어가다 보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엄청나게 거대한 신전이 드러난다. 영화 ‘인디애나 존스 - 최후의 성전’에서 고고학자로 분한 해리슨 포드가 찾아냈던 고대도시 페트라의 ‘알카즈네’라는 신전이 바로 그것이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이곳은 이집트와 아라비아, 시리아와 페키니아 사이의 중요한 교차로여서 오래 전부터 번영을 누렸다. 바위산을 깎아서 만든 페트라의 건물들은 고대 동방의 전통과 헬레니즘 건축 양식이 융합돼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의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독특한 예술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고대도시 페트라의 대표 건축물 ‘알카즈네’. ⓒ Pixabay Public Domain

페트라를 처음 건설한 이는 기원전 6세기의 나바테아인들이었다. 셈족의 일원으로 알려진 그들은 이곳을 수도로 삼아 멀리 중국과 인도에서 시작돼 아라비아 반도의 각 항구에 도착한 물품들을 지중해에 위치한 도시들에 팔았다. 한마디로 사막 대상로의 중심에 위치한 대상무역 도시였던 셈이다.

그런데 서기 106년 나바테아 왕국은 로마제국에 의해 아라비아의 일부로 합병됐다. 이곳을 자신의 세력 하에 둔 로마는 도로를 건설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했으며, 이후 페트라의 무역은 점차 쇠퇴했다. 636년에는 아랍인이 이 도시를 정복했으며, 그 무렵쯤 대지진이 발생해 도시의 기반이 파괴됐다.

12세기엔 십자군이 이곳에 요새를 건설했지만 그들은 곧 철수했다. 이후 수백년 동안 잊혀졌던 이곳을 다시 발견한 이는 1812년 스위스의 탐험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였다. 그는 유목민인 베두인족 사이에서 전해오던 전설을 우연히 듣고 협곡 속에 잠들어 있던 옛 도시를 찾아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 독일, 스위스, 미국, 핀란드 등의 발굴단이 구성돼 조직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베두인족 사이에 전해오던 전설은 협곡 속의 어느 꼭대기에 보물 창고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발굴단은 고대도시에서 찾아낸 가장 멋진 건축물에 ‘알카즈네’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랍어로 ‘보물 창고’라는 뜻이다.

너비 30m, 높이 43m의 알카즈네는 절벽의 바위를 깎아 만든 건물이다. 사암 덩어리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일일이 조각해 이음새가 거의 없이 견고하고 매끈한 것이 특징이다. 이 건물은 나바테아적 요소가 없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세계와 헬레니즘 예술 간의 배타적 유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관문처럼 버티고 선 알카즈네 뒤로는 신전과 무덤이 널려 있다. 북쪽으로는 ‘왕의 벽’으로 알려진 바위 정문에 조각된 3개의 거대한 구조물 ‘제벨 쿱타’가 있으며, 그 뒤로는 로마가 다스리던 시절의 로마 총독의 무덤 등이 있다.

로마 시대의 또 다른 유산으로는 계곡의 남쪽 끝에 바위를 파내어 만든 서기 1세기의 극장을 들 수 있다. 원형식의 이 대극장은 반경 95m에 45개의 열로 구성된 객석이 있어 총 7천~1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페트라의 건축물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노란색에서 붉은색, 진한 갈색까지 다양한 색을 연출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예를 들어 알카즈네는 아침에 가장 아름다우며, 협곡 정상에 위치한 알데이르 사원의 경우 석양에 보는 것이 더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색채에 매료된 영국의 시인 존 월리엄 버건은 “영원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밋빛 붉은색의 도시”라고 묘사했다.

페트라의 또 하나 특징은 매우 독창적인 치수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성기 시절 페트라와 주변 지역에는 50여 만 명이 거주했다. 강이나 호수가 없는 사막 지역에 어떻게 그처럼 많은 인구가 상주할 수 있었을까.

페트라 지역의 연간 강수량은 평균 130~150㎜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반경 25㎞ 이내의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단 한 방울도 아무렇게나 흘려보내지 않았다. 대형 댐과 저수시설, 그리고 지하 곳곳에 물 저장고를 설치해 그 빗물을 1년 내내 안정적으로 사용했던 것.

요르단박물관에 의하면 페트라의 도시 내에만 200여 개의 저수시설이 있어 약 4160만 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도시 내의 상주인구가 1년 동안 사용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이외에도 주변 지역에 별도의 수리 시설이 있어 사막 지역임에도 총 50만 명이란 인구를 거느릴 수 있었다.

수로의 자취, 터널, 계절성 빗물을 저장하고 관리하는 집수지, 물탱크들을 방대하게 연결한 우회 댐 등의 유적들이 당시의 치수 기술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구리 광산과 지하 갱도 등 기원전 4세기 광산 건축물도 매우 탁월한 사례다. 이외에도 열주가 늘어선 길과 3중 아치를 이룬 출입문, 목욕탕 등을 포함한 그리스 및 로마의 건물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페트라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07년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선정됐다. 하지만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관광객들이 폭증해 도시의 주요 출입로인 ‘시크’에 대한 안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나바테아의 치수 체계가 지속적으로 보수․관리되지 않을 경우 돌발적인 홍수 때 시크가 취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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