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원문은 인터넷 과학신문 <The Science Times>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문 보기)

 

오스트리아가 유로 화폐를 도입하기 이전에 발행한 20실링짜리 지폐 뒷면에는 좀 독특한 풍경이 인쇄돼 있었다. 알프스 산맥의 험난한 구간인 뮈르츠슐라크와 글로그니츠 사이를 이어주는 제메링 철도가 바로 그것. 그리고 지폐 앞면에는 이 철도를 건설한 오스트리아의 엔지니어 ‘카를 리터 폰 게가’가 등장한다.

1848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854년에 건설된 길이 41㎞의 제메링 철도는 세계 최초의 산악철도이다. 증기기관차 철도 기술이 첫 선을 보이던 무렵에 완성된 작품으로서, 초기 철도 가설의 주요한 물리적 문제점을 뛰어난 기술로 해결해 철도 건설 초창기 토목공학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오스트리아 20실링 지폐 뒷면의 제메링 철도 도안. ⓒ 위키미디어 public domain

해발고도 985m의 제메링 고개를 관통하는 이 수송로는 선사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중세 시대에 알프스를 횡단하는 몇 안 되는 안전한 경로로서, 12세기까지 베니스에서 출발하는 가장 중요한 국제 육상 운송로 중 하나였다.

오스트리아에 증기기관차가 도입된 건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지10여 년 후인 1837년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4년 후 빈에서 알프스 산자락의 글로그니츠까지 철도가 개설됐다. 1844년에는 뮈르츠슐라크에서 그라츠 사이의 노선이 추가됐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를 남북으로 가르는 철도는 알프스 산맥 밑에서 멈춰버린다. 제메링 구간의 철도 공사가 어려워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실 1841년에 제메링을 횡단하려는 최초의 설계안이 나왔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취소됐다. 증기기관차 발명가로서 철도의 아버지로 불리던 조지 스티븐슨조차 제메링 철도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1842년 폰 게가가 책임 감독관으로 임명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미국으로 건너가 30여 개 철도 노선을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1:30의 경사도(수평거리를 30만큼 갈 때 수직거리가 1만큼 증가한다는 의미)에서도 기차가 다닐 수 있음을 확신했다.

1854년에 건설된 길이 41㎞의 제메링 철도는 세계 최초의 산악철도이다. ⓒ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이후 그는 제메링 구간의 전 지역을 조사하면서 철도가 가능한 경로를 찾았다. 1846년 드디어 최적의 경로를 결정한 그는 이듬해에 설계까지 마무리지었다. 이 과정에서 폰 게가는 높이와 거리를 측정하는 새로운 측량기기 ‘슈템퍼스슈벨리어호헨과 링켄매신슈트루멘트’를 개발하기도 했다.

폰 게가의 계획은 시작부터 전문가와 언론의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후원으로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실업률이 상당히 높은 상태였는데, 산악철도를 짓게 되면 장기적인 고용 증대를 가져올 수 있다는 속셈이었다. 실제로 공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약 1만 500명이 고용되었는데, 공사를 진행하면서 그 수가 2만명 이상으로 증대했다.

폰 게가가 확정한 경로에는 22개의 교량 및 고가교를 비롯해 길이 1200m의 터널도 포함돼 있었다. 터널 굴착을 위한 다이너마이트도 아직 발명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인부들은 총포용 화약과 수동 드릴 등의 장비를 이용해 터널을 뚫어야 했다. 또한 알프스의 눈사태로부터 선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호벽을 건설해야 하는 등 난공사가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700여 명의 인부들이 전염병에 걸려 희생되기도 했다.

공사가 착착 진행되던 1851년에는 선로를 운행할 기관차를 선정하기 위한 대회가 열렸다. 4개의 기관차 회사가 참여한 이 대회에서 독일 뮌헨의 마페이 사가 우승을 차지했으나, 4개 모델 모두 약간의 결함이 있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정부는 참여작들의 우수한 특징들을 조합해 새로운 형태의 기관차를 설계했다. 설계자의 이름을 따 ‘엥거스 시스템’으로 분류된 이 기관차는 26대가 생산됐다.

어려운 과정 속에 완성된 제메링 철도는 마침내 1854년 7월 17일 첫 승객과 화물을 예정대로 수송하기 시작했다. 당시 제메링 철도의 경사도는 25퍼밀(1000m를 달리면 높이가 25m 상승하게 됨)에 달했으며, 심한 커브 길의 반지름은 190m에 불과할 정도였다. 제메링 철도의 거점이었던 뮈르츠슐라크역 자료관에는 당시 설계도부터 건설에 사용된 도구와 기관차 등의 자료가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제메링 철도는 현대의 기술로도 어려운 공사인데, 당시 공학으로는 획기적이었다. 따라서 철도공학자들은 이를 두고 인간 승리라고 일컬었다. 제메링 철도는 이후 건설된 모든 산악철도의 모델이 되었으며, 평지에만 적합하다고 여겨졌던 철도에서 산이라는 장벽이 사라지게 됐다.

185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가는 열차가 운행되면서 제메링 철도의 운송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지닌 이 지역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주거와 여가 활동을 위한 개발이 진행되어 새로운 형태의 문화 경관이 형성되었다.

제메링 철도는 1959년부터 더 이상 증기력을 동력으로 삼지 않지만, 지금도 여전히 정기적으로 운행된다. 그러나 전기 기관차를 운행하는 데 필요한 전선을 가설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면서 전체 노선은 크게 변경됐다.

최근에는 체코 프라하에서 오스트리아 그라츠를 잇는 레일제트가 등장해 기차 마니아들에게서 큰 반응을 얻고 있다. 레일제트는 빈과 그라츠 구간에서 시속 200㎞로 달리기도 하지만, 제메링 구간에서는 시속 40㎞ 전후로 속도를 낮춘다. 많은 부분이 새로운 선로로 교체됐으나 험난한 지형으로 여전히 느리게 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메링 철도는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철도가 되었다. 이후 역시 알프스를 넘는 스위스 레티셰 철도와 히말라야를 넘는 인도 산악철도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