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장호 감독을 만나 소주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영광스런 자리가 있었다. 만나기 전에는 이제 70대가 넘었기에 ‘원로감독’이라고 해도 덜 섭섭할 나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웬 걸? 이장호 감독은 젊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 소주를 마셨다. 술 뿐만이 아니었다. 술자리에서 풀어놓는 얘기보따리는 좌중을 주도하고도 남았다. 유머러스하고 발랄하면서 다이내믹했다. 또 여전히 새로운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새로 쓰고 있는 시나리오 얘기를 하면서 청년처럼 상기된 표정이었다.

청년들이 힘이 빠져 있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청년들이 잘 나가던 시대를 그리워하는 건 역행일까? 이장호 감독은 누구보다도 화려한 청년의 시대를 살았던 표본이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얘기하는 대신 청춘의 한 때를 거침없이 살았던 이장호 세대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을 사는 청년들에게 힘내라고 얘기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장호 감독이 20~30대를 지나온 70년대는 따지고 보면 밥 세끼를 해결하기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청년들은 꿈틀거리는 정신과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낭만이 있었다. 70년대 청년문화를 통기타와 청바지로 정의한 건 문학평론가이자 당시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김병익 선생이었다. 김병익 기자가 청년문화의 기수로 꼽은 이들 중에 작가 최인호와 영화감독 이장호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가수 이장희는 두 사람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이들 세 사람은 70년대 영화 <별들의 고향>이라는 공전의 히트작을 내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청년문화의 기수였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 그들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추운 자취방에서 글을 쓰거나 노래를 만들면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철저하게 무명의 청년들이었다.

영화 <별들의 고향> 스틸컷.

서울고 동창생들이 합작한 <별들의 고향>

잘 알려져 있다시피 최인호와 이장호는 서울고등학교 동기 동창이었다. 이장희는 2년 후배였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세상에 이름 석자를 알린 이는 소설가 최인호였다. 최인호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한 ‘천재소년’ 작가였다. 그당시 중앙일보 문화부에 근무하던 정규웅의 증언에 의하면 교복입은 최인호가 걸어들어와 “신춘문예 입선했다는 통지를 받고 왔다”고 얘기했을 때 누군가의 대리인으로 심부름 온 줄 알고 “본인이 직접 오라. 대신 오는 건 안된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그런 천재작가도 빛을 보기까지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최인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을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처음 소설의 제목은 <별들의 무덤>이었지만 신문사 간부가 “조간신문에 재수없게 무덤이라니…. 다른 이름으로 고쳐봅시다”라고 얘기해서 <별들의 고향>이 됐다.

차가운 도시의 뒷골목에서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된 호스티스 경아의 사랑이야기였다. 신문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출판사 예문관의 대표가 최인호를 호출했다. 그때 함께 간 친구가 바로 이장호였다. 그 자리에서 예문관 대표는 당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출판 계약금을 현금으로 내놓았다.

“갑자기 현금을 탁자에 쌓아놓는데 우리들은 생전 처음 보는 거금인거야. 일단 싸인을 하고 그 돈을 가져가도 되냐고 한 번 더 물었지? 가져가라는데 어디 담아갈 데가 없어서 점퍼를 벗어서 싸들고 나왔지.”

이장호 감독은 그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이 책은 날개 돋힌듯이 팔려서 100만 부가 넘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작가 최인호에게 출세작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문단에서 대중작가, 상업작가로 낙인찍히는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문단에 남아 있는 폐해지만 베스트셀러는 곧 상업작가라는 이상한 공식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70년대 중반은 3선 개헌과 유신헌법 등으로 한층 검열이 강화되어 새마을운동 영화와 전쟁영화, 반공을 기치로 내세운 영화들이 판치던 시절이었다. 충무로에서 1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소설은 누구든 군침을 흘릴 만했다. <별들의 고향>은 영화로 만들기에 딱 좋은 대중적인 소재였다.

 

가수 윤시내 ‘별들의 고향’ 주제가로 데뷔

최인호가 손잡은 사람은 이장호와 이장희였다. 그들이 함께 만든 <별들의 고향>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 가면서 승승장구했다. 신필름의 조감독으로 있으면서 영화사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하던 이장호는 친구를 잘 둔(?) 덕분에 누구나 탐내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한 영화로 감독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경아, 오랜만에 함께 누워보는군”,“아저씨, 추워요. 안아주세요”,“내 입술은 작은 술잔이에요” 등 아직도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회자되는 명대사를 남긴 영화 <별들의 고향>은 당대 최고의 톱스타 신성일과 아역배우 출신 안인숙을 주인공으로 4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속편과 속속편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천만 영화가 흔한 시대가 됐지만 그당시 개봉관 한 곳에서 기록한 수치가 46만이니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영화였던 셈이다.

‘난 그런 거 몰라요 / 아무 것도 몰라요 / 괜히 겁이 나네요 / 그런 말 하지 말아요 / 난 정말 몰라요 / 들어보긴 했어요 / 가슴이 떨려 오네요 / 그런 말 하지 말아요 / 난 지금 어려요 / 열아홉살인 걸요 / 화장도 할 줄 몰라요 / 사랑이란 처음이어요 / 웬일인지 몰라요 / 가까이 오지 말아요 / 떨어져 얘기해요 / 얼굴이 뜨거워져요.’

‘쎄시봉’의 멤버였던 이장희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와 ‘한 잔의 추억’ 등을 담은 이 영화의 O.S.T로 영화음악의 새 장을 열었다. 이장희는 1972년 데뷔 이후 통기타 문화의 기수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당시만 하더라도 영화음악에 대한 인식이 지극히 낮았다. 노래가 히트하면 그 노래를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절이었다.

“제가 조감독 시절만 하더라도 영화음악을 만드는데 2시간이면 됐죠. 그런데 `별들의 고향'은 꼬박 한 달 걸렸어요. 한창 잘나가는 가수가 영화음악을 맡은 것도 처음이었죠.”

이장호 감독의 회상처럼 이장희는 쓸만한 O.S.T를 만들어냈다. 이장희는 <별들의 고향>을 수십차례 읽으면서 가사를 쓰고 악상을 떠올렸다. 그러나 편곡에 능하지 못한 이장희에게 편곡자가 필요했다.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친구 강근식이 참여했다. 플룻을 전공했던 레코드회사 사장도 ‘뭔가 작품을 만들어보자’면서 흥분했다.

‘난 열아홉살이예요’는 이장희 대신 앳된 소녀가 필요하다는 결론 끝에 가수를 물색했다. 그때 여고를 갓 졸업하고 미8군 패키지무대서 노래하던 긴머리 소녀가 나타났다. 나이도 열아홉. 미성의 맑은 목소리로 정말 실감나게 불렀다. 수년 뒤 중저음의 보이스로 ‘열애’를 불러 인기가수 대열에 오른 윤시내가 ‘나는 열아홉살이예요’를 불렀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별로 없다.

소설이나 영화의 성공 못지 않게 이 앨범도 불티나게 팔렸다. 또 함께 수록됐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잔의 추억’ ‘휘파람을 부세요’ 등 거의 전곡이 히트곡 반열에 올랐다. 소설과 영화, 음반이 동반히트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사랑하던 남자가 자신을 배신하고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슬픈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결국 낙태를 하는 장면에서 장희가 부른 ‘한 소녀가 울고 있네’가 깔렸죠. 이 장면에서 극장 안은 온통 눈물바다였어요.”

이장희는 단 2주일 동안 입시공부를 해서 연세대에 입학할 정도로 천재성을 가지고 있던 청년이었다. 그는 가수로서는 그리 탁월하지는 않았지만 작사와 작곡 솜씨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훗날 동료 선후배 가수들에게 많은 히트곡들을 만들어줬으며, 본인이 직접 앨범 제작을 하는 등 재능을 꽃피우기도 했다.

당시 영화를 찍을 때만 해도 제대로 된 대본을 만들어서 찍을 때가 아니었다. 이장호 감독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첫 크랭크인이 맨 마지막 장면이었다고 회고했다.

“영화를 찍기로 하고 캐스팅도 다 끝냈는데 마침 눈이 쏟아지는거야. 그런데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엔딩씬에 꼭 눈 내리는 장면이 필요했거든. 무조건 한강으로 다 나오라고 해서 엔딩씬부터 찍었지.”

 

대마초 사건으로 좌절했다 재기

그러나 패기만만했던 청년들은 하루아침에 몰락한다. 1976년 이장호 감독과 가수 이장희는 대마초사건에 연루되어 활동을 금지 당하게 된다. 이장호 감독은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술자리에서 편한 농담으로 눙친다.

“내가 들어가서 조사를 받고 있는데 돌아가신 박상규씨가 잡혀 들어오는거야. 그 친구가 원래 잘 웃고 낙천적이에요. 잡혀 들어오면서 나한테 손을 들어서 인사를 하면서 웃는 거에요. 그래서 같이 눈인사를 나눴지. 그런데 옆방에서 퍽, 퍽 하면서 누군가가 폭행 당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구. 나중에 보니까 박상규씨가 얼굴이 퉁퉁 붓고 입술이 터져서 끌려 나오는거야. 그 와중에도 얼마나 우습던지.”

최인호 역시 유신정권과 맞서 싸우던 지식인들로부터 현실성이 결여된 대중작가로 낙인 찍혔다. 또 이보다 앞서 1975년 대통령 긴급조치 9호발표로 ‘나는 열아홉…’‘나 그대에게 모두…’는 금지곡이 됐다. 가사가 선정적이고 특히 ‘나는 열아홉살이예요’는 미성년자 약취강간을 연상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이후 여러 차례의 해금조치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아주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여있어야 했다. 그러나 최인호는 중견작가가 된 이후부터 잇달아 무게감 있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그가 반짝 재능을 가진 상업주의 작가였다는 오명을 벗었다.

여하튼 이장희의 감성과 윤시내의 앳된 목소리가 빚어낸 ‘난 열아홉살이예요’는 유신정권의 서슬 아래 퇴폐적 청년문화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희생양이 된 셈이다. 또 압제와 싸우던 지식인 사회에서도 민중들의 투쟁의지를 희석시키는 상업적이고 퇴폐적인 노래라는 이유로 외면당한 셈이다. 그러나 첫사랑에 가슴 설레는 여심(女心)을 이처럼 절묘하게 표현해낸 노래가 또 있을까. 저 70년대. 노래를 듣다보면 산업화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차가운 도시에서 자살을 택한 경아의 슬픔이 우리 누이들의 그것처럼 느껴져 가슴을 쓸어내린다. 비록 최인호는 암과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이장호 감독과 가수 이장희는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나고 보면 청춘의 한 때가 빛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나이가 든 이들은 젊은이들의 패기와 열정이 부럽겠지만 당사자들은 늘 힘들고 괴로운 시기가 청춘의 한 시절이다. 지금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준비를 해놓고 끈질기게 기다리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그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이다. 최인호와 이장호, 이장희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청춘의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한 차례 시련을 겪고 무너졌지만 다시 보란 듯이 재기했다. 다시 청년들의 시대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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