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C 연포 해변가요제.

‘흥에 겨워 여름이 오면 / 가슴을 활짝 열어요 / 넝쿨장미 그늘 속에도 / 젊음이 넘쳐 흐르네 / 산도 좋고 물도 좋아라 / 떠나는 여행길에서 /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 사랑이 오고 가네요 / 여름은 젊음의 계절 / 여름은 사랑의 계절.’

여름이 되면 떠오르는 노래 중에 징검다리의 ‘여름’이 있다. 아마도 젊은층은 잘 모르겠지만 중년을 넘어선 나이라면 “아, 그 노래”하고 떠오를 것이다. 이정선이 작사·작곡한 이 노래는 1978년 7월 제1회 연포 해변가요제에서 1등상인 그랑프리를 받은 곡이다. 한양대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4인조 혼성그룹 징검다리가 불렀다. 당시 참여한 멤버 중에서 왕영은은 <뽀뽀뽀>의 뽀미언니로 발탁되어 유명해졌다. 

사실 동양방송(TBC) 라디오가 주최한 이 가요제에는 지금 들어도 신선한 창작곡을 가지고 출전한 기라성 같은 대학생 가수들이 많았다. 홍익대 생들로 결성된 블랙테트라의 ‘구름과 나’ , 항공대생으로 결성된 런웨이의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등이 눈에 띈다. 또 중앙대 그룹인 블루 드래곤의 ‘내 단 하나의 소원’, 피버스의 ‘그대로 그렇게’ 등이 1회 해변가요제 입상곡들이다. 사실 구창모가 싱어로 나선 블랙테트라의 ‘구름과 나’, 피버스의 ‘그대로 그렇게’, 가수 김성호가 싱어로 나선 블루드래곤의 ‘내 단 하나의 소원’, 배철수가 소속된 런웨이의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등 ‘여름’보다 뛰어난 곡들이 많았는데 징검다리가 그랑프리를 받은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신인과 기성을 가리지 않고 출전할 수 있다는 대회요강이 있었으니 기성가수가 만든 곡으로 출전하여 상을 탄 징검다리에 시비를 걸 수도 없다. 다만 그 당시에도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심사결과를 놓고 갑론을박이 치열했다. 지금같은 SNS 시대였다면 크게 문제될만한 소지가 많았다. 당시 심사평에 따르면 ‘구름과 나’를 부른 구창모가 대학생 답지 않게(?) 너무 잘 불렀다는 게 그랑프리를 놓친 이유였으니 말이다. 

사실 해변가요제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77년 문화방송·경향신문이 제1회 대학가요제를 개최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잘 알다시피 서울대생으로 결성된 그룹 샌드 페블스가 부른 ‘나 어떡해’와 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이 대학가요제에 입상하면서 그해 가요계를 뜨겁게 달궜다. 대학가에 통기타 열풍과 더불어 학교마다 스쿨밴드들이 우후죽순으로 결성되면서 대학축제를 수놓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기획한 프로그램이 대학가요제였다. 그 당시 동양방송은 문화방송의 라이벌 방송사였다. 비록 수도권을 커버하는 로컬방송으로 전국방송은 아니었지만 참신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MBC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동양방송 이사로 재직 중이었다. 이병철 회장이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동양방송에 입사시켜서 차근차근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건희 동양방송 이사는 대학가요제에 비견될만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라고 지시했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여름 시즌에 해변에서 개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 특명 뒤에는 삼성그룹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었다. 해변가요제가 열린 연포해수욕장은 충남 태안읍에서 남서쪽으로 약 9km 떨어져 있는 해수욕장이었다. 삼성그룹은 개발을 위해 연포해수욕장 인근의 토지를 매입해놓고 있었다. 그 이면에는 서해안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인 대천해수욕장에 비해 덜 알려진 연포해수욕장을 개발하여 유명한 휴양단지로 만들겠다는 삼성그룹의 야심이 숨어 있었다. 연포해수욕장 인근 태안군 근흥면 일대 총면적 2,208만 1,304㎡(약 67만평)의 땅은 1969년부터 약 6~7년에 걸쳐 사들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삼성가는 수십년 간 개발을 하지 않은 채 이 땅을 방치했다.

여하튼 동양방송은 1980년 전두환 군부정권이 방송통폐합을 진행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건희 당시 동양방송 이사도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방송가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어찌됐든 아직도 우리 머릿속에 맴도는 대표적인 여름 노래가 이건희 회장의 머릿속에서 출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필자 소개>

오건은 대중문화 주변부에서 오랫동안 일해왔다. 신명 나게 사는 딴따라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만든 콘텐츠들을 좋아하고 지지한다.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그날까지 글을 통해 비판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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