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원문은 인터넷 과학신문 <The Science Times>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문 보기)

 

지금으로부터 412년 전인 1604년 10월 지구의 밤하늘에는 전혀 못 보던 새로운 별이 하나 반짝였다. 이 별은 밤하늘의 어떤 항성보다도 밝았으며, 금성을 제외한 나머지 행성들보다 밝았다. 그 별의 정체는 뱀주인자리에서 폭발한 초신성이었다.

초신성이란 태양보다 큰 별이 마지막 죽는 순간에 폭발하면서 엄청나게 밝은 빛을 내는 천제를 일컫는다. 이 별에 대해 최초로 관측 기록을 남긴 이는 10월 9일 이탈리아의 의사였으며, 당시 천문학의 거장 요하네스 케플러는 10월 17일 프라하에서 관측에 착수했다.

그는 ‘뱀주인자리의 발 부분에 있는 신성’이라는 책을 통해 약 1년간 이 천체를 연구했으며, 그 결과 이 별은 ‘케플러 초신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케플러보다 더 상세히 이 별을 관측한 기록이 있다.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1604년 우리은하 뱀주인자리에서 폭발한 케플러 초신성의 잔해. ⓒ 퍼블릭 도메인

조선왕조실록에는 1604년 10월 13일부터 1605년 4월 23일까지 7개월간 약 130회의 케플러 초신성에 대한 관측 기록이 있는데, 거의 매일 밝기와 크기 등을 목성이나 금성 등과 비교해 자세히 묘사해놓았다. 특히 이 기록은 폭발 초기 가장 밝았던 50일 동안의 변화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케플러의 관측 기록보다 훨씬 더 정밀한 기록이다. 당시 유럽은 날씨가 흐려 이탈리아 의사가 처음 관측한 이후 케플러가 다시 관측하기까지 약 1주일 동안의 관측기록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그 공백을 메워주고 있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기록의 정밀도 면에서도 뛰어나 케플러의 관측기록보다 현대 과학자들에게 더 자주 인용되고 있다.

한 예를 들면, 케플러의 관측기록만 보면 이 초신성은 유형 2로 추정된다. 그러나 실록의 기록을 합해 보면 유형 1이 분명해진다. 유형 1 초신성은 태양처럼 비교적 작은 항성이 수소핵융합을 모두 마친 뒤 폭발한 것이고, 유형 2 초신성은 태양보다 8배 이상 큰 별이 수명을 다해 폭발해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분류가 중요한 이유는 유형 1의 경우 초신성의 밝기 곡선이 규칙적이어서 먼 거리에 있는 천체들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천문학자들은 유형 1 초신성을 이용해 먼 은하들까지의 거리를 구하고 있으며, 2011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의 경우 우주의 팽창 속도가 약 40억년 전부터 갑자기 가속도가 붙으며 빨라졌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케플러 초신성의 관측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이는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었다. 1966년 중국의 천문학자들이 서울대 규장각에서 이 기록을 발견한 후 서구의 천문학자들에게까지 널리 소개된 것. 정작 국내에서는 이 같은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가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로 재직 중 1997년 고등과학원 원장으로 부임해 귀국한 김정욱 박사에 의해 알려지게 됐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가장 긴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세계사를 통틀어 조선처럼 500년 이상의 역사를 이어온 왕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실록인 ‘대청역조실록’의 경우 296년간의 기록이며, ‘황명실록’도 260년간의 기록에 불과하다.

조선왕조실록의 태백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가장 긴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 문화재청

이에 비해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제26대 ‘고종실록’과 제27대 ‘순종실록’은 망국 이후 일본이 설치한 이왕직에 의해 편찬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편찬 기준이 이전의 실록과 달라 두 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황명실록’의 경우 2964권에 글자 수는 1600만자인 데 비해 ‘조선왕조실록’은 1707권인데도 약 6400만자에 이를 만큼 방대한 분량이다. 더구나 조선왕조실록은 내용이 다양하여 가히 백과전서적 실록이라 할 수 있다.

케플러 초신성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천문 현상 및 자연재해 등의 과학적 사실을 포함해 정치, 외교, 사회, 경제, 학예, 종교 생활, 지리, 음악은 물론 동북아시아의 외교적 관계가 수록되어 있는 종합사서이자 국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의 생활기록이 담겨져 있는 민족문화서인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은 기록물이라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편술까지 담당했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편찬에 대한 비밀성을 보장받았던 전문관료였다. 사관의 기록은 왕이라 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고, 비밀이 보장되는 이 같은 제도가 실록의 진실성 및 신빙성을 보장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일부 소실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재출간하거나 보수하여 20세기 초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네 사고에서 각각 1부씩 전해졌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정족산 및 태백산사고의 실록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창경궁 장서각에 각각 보관했다. 그리고 오대산사고의 실록은 1913년 일본의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했다.

일본으로 반출된 오대산사고의 실록은 1923년 간토대지진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소실되지 않은 74책 중 27책은 1932년에 국내로 돌아왔고 나머지 47책도 각계각층의 노력 덕분에 2006년 국내에 반환됐다.

정족산 및 태백산사고의 실록은 광복 이후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서울대학교에 계승되었다. 그러다 조선 시대의 실록 분산 보관 전통을 이어서 태백산사고의 실록은 국가기록원 부산센터로 옮겨졌다. 창경궁에 보관되던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6.25전쟁 때 행방불명되었다가 현재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에 보관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오대산본 모두가 일괄적으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