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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6월 서울 종로구 삼청동 근처에 기지창이 세워졌다. 기지국에 소속된 기지창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세워진 근대식 무기공장이었다. 그런데 기지창이 세워지기 전부터 고종은 신식무기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일성록’에 의하면 고종은 1881년 개화승이었던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해 비밀리에 군함과 총기를 구입하려 했으나 실패한 후 일본에 있던 미국 상사를 통해 4천정의 미제 소총을 구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쇄국정책이 물러가고 개항이 이루어진 이래 미국,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와 차례로 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서구의 과학기술이 물밀듯이 흘러들어왔다.

그 같은 개화 무드 속에 고종은 청나라 제도를 모방해 1880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12사를 두어 사무를 분담케 했는데, 그중 과학기술에 관계되는 것만 해도 군물사, 기계사, 선함사, 이용사 등 4개를 차지할 만큼 과학기술을 중시했다.

‘일성록’엔 서양의 과학기술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많다. ⓒ 문화재청

고종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했을 때부터 이미 무르익어 있었다. 이 역시 ‘일성록’의 기록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조약의 답례차 파견했던 수신사 김기수가 돌아왔을 때 전선(電線), 대륜(大輪), 농기(農機)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규장각일기’와 더불어 ‘조선왕조 3대 연대기’로 불리는 ‘일성록’엔 이처럼 서양의 과학기술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많아 세계사적 가치가 높다.

당시 서양의 제국주의가 확장되면서 동아시아는 동서양 강대국들의 충돌과 투쟁의 현장으로서 세계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자국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단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였는데, 일성록에는 18세기 및 19세기에 이 과학기술이 전국 각지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담겨 있다. 또한 일성록에는 강대국들의 팽창과 충돌의 과정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19세기 후반 이후의 국제질서를 연구하는 자료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일성록의 모태가 된 것은 정조가 9세 때부터 쓴 ‘존현각일기’이다. 정조는 8세 때인 1759년(영조 35) 왕세손으로 책봉된 후 아버지였던 사도세자가 죽으면서 졸지에 왕위를 계승할 신분이 되어 1762년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1776년 왕위에 오를 때까지 경희궁에서 생활했는데, 자신이 거처하던 경희궁 친현각의 1층이 바로 존현각이다.

존현각일기는 바로 그 무렵 정조가 쓴 일기였는데, 왕이 된 이후에도 정조는 계속 일기를 썼다. 그러다 즉위 5년(1781년)부터 규장각 관원들에게 명령해 매일매일 일기를 작성한 다음 5일마다 이를 자신에게 올려 결재를 받도록 함으로써 왕의 일기를 국가의 공적 기록물로 만들었다.

이후 1910년(순종 4)까지 151년간 조선 왕 6대의 일기 형식 기록이 총 2329책으로 남은 게 바로 ‘일성록’이다. 보통의 역사 기록물과 달리 일성록은 목적이 매우 확실했다. 왕이 자신의 통치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물론 후대 왕들이 이를 보고 국가 통치에 참고하고 이용할 수 있게끔 한 것이 때문. 이는 왕들의 열람을 아예 금지한 조선왕조실록 및 승정원일기와 가장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또 하나, 일성록은 조선왕조실록이나 같은 시기의 승정원일기보다 더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1대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만 실록으로 인정되고 있다.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의 기록은 망국 이후 일본이 설치한 이왕직에 의해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왕의 통치기를 다룬 승정원일기 역시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어, 일성록에서 그에 해당하는 부분을 참고하거나 인용해 소실된 내용을 복원했다.

일성록은 기록의 정확성 면에 있어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경기도와 화성시는 2011년 11월부터 화성시 안녕동 만년제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만년제는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성하면서 백성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고자 만든 저수지 중 하나다.

기록에 의하면 만년제는 1798년 2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2개월여에 걸쳐 약 3만7920명이 동원돼 대대적인 굴착 및 준설작업으로 이룩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수리시설이다. 특히 만년제에는 가운데에 축조한 동그란 섬인 ‘괴성’이 위치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발굴 조사 결과, 그동안 묻혀 있었던 만년제의 전모가 밝혀졌다. 그런데 일성록에 기록돼 있는 괴성 및 제방 등의 규모와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유적의 크기가 너무나 일치해 전문가들조차 당시 기록의 철저함과 정확성에 감탄했다고 한다.

일성록은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인쇄본이 아닌 필사본이라 단 한 질만 전해진다. 내용은 주로 국가의 의식 절차와 지방 관리의 보고서, 의금부와 형조의 죄수 문초 및 판결에 관한 기록, 일반 백성의 상소와 그에 따라 취한 조치, 암행어사의 보고서, 외교 관련 문서, 사신들의 보고서 등으로서 조선시대의 다른 역사 기록문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창적인 내용들로 구성돼 있다.

일성록은 1973년 국보 제153호로 지정됐으며, 조선이라는 한 국가의 역사 기록물을 넘어서는 세계사적 중요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2011년 5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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