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전 언론인.
임순만 전 언론인.

[이코리아] 한국 이미지 및 외교의 국제적 위상이 날로 추락한다는 인상을 준다. 지난해 11월 2030 세계박람회 유치 도시 선정 투표에서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29대 119의 압도적 표 차로 패배했다. 전 세계 국가들로부터 지지를 얻은 표가 고작 28표란 점에서 한국 외교력의 처참한 수준을 드러냈다. 이는 지난해 8월 세계스카우트 새만금 잼버리의 부실 운영과 열악한 부대시설로 참가자 전원이 중도 퇴영한 사태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는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외압 의혹으로 수사받는 이종섭 전 국방부장관이 주 호주 대사로 임명돼 그의 출입국 문제를 둘러싸고 국내외의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국회에서 채 상병 특검 처리가 예상되는 마당에 주요 혐의자를 외국 대사로 내보냈다가 비판적 여론이 확산하자 공관장 회의가 있다며 급히 귀국하게 하는 것은 상대국 호주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한국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이 대사 귀국에 대한 언론의 사설을 보면 이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 심각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대사 귀국 다음날인 3월 22일자 신문 사설들의 제목은 중앙일보 ‘이종섭 구하기 공관장 회의 급조, 과연 옳은 일인가’, 동아일보 ‘이종섭을 위해 공관장 회의 급조, 무리수가 무리수 낳는다’, 한겨레 ‘이종섭 귀국용 회의 급조, 나라 망신·세금 낭비’, 경향신문 ‘현실화한 피의자 대사 리스크, 외교에도 부담 주는 이종섭’, 한국일보 ‘공수처, 이종섭 수사 외풍에 떠밀리면 안 된다’ 등으로 일제히 부정적 시각을 보였다. 

국가이미지는 정교하면서도 차원 높은 전략에 의해 관리돼야 한다. 나쁜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은 쉽지만, 한번 부정적으로 형성된 이미지를 좋은 쪽으로 전환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국제사회에서 그 나라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쌓이면 결정적일 때마다 지구촌의 도움을 받기 마련이다. 한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를 어떻게 바꿨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세계 2차대전 말기 식민지 한국과 패전국 일본은 도마 위에 오른 생선과 같은 신세였다. 칼자루는 열강들이 쥐고 있었다. 그때 열강들의 칼은 한국을 동강 냈다. 그러나 일본은 대단한 혜택을 받았다. 이유는 열강들의 한국에 대한 무지와 일본에 관한 호의적 관심 때문이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혔다. 소련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전에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한반도 북단 나진을 거쳐 빠른 속도로 남진을 계속했다. 당시 소련의 속도대로라면 8월 20일이면 서울 점령까지 가능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워싱턴 펜타곤의 국무부, 전쟁부, 해군부의 3부조정위원회(SWNCC) 사무실에서 대책을 논의했다.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을 당장 한반도로 상륙시키기란 불가능했고, 소련의 진주를 저지시키기 위한 대책이 묘연했다. 

자정을 넘겨 11일까지 계속된 회의에서 미국은 소련에 제시할 협상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한반도를 둘로 나눠서 미·소가 각각 점령하기로 약속하자는 안이었다. 육군부의 딘 러스크(Dean Rusk) 대령과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ll) 대령이 한반도를 자르기 위해 지도를 찾았다. 한반도 지도가 눈에 띄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서 B4사이즈 크기의 지도를 찾아냈다. 지도에는 위도 30도와 40도 선만 표시돼 있을 뿐 38도 선은 나와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도에서 부산, 목포, 군산, 인천 등의 전략적인 항구와 수도 서울이 남쪽에 포함될 수 있도록 한반도 가운데보다 약간 북쪽으로 올려 지도 위에 구불구불 선을 그었다. 아래 남쪽과 일본은 미군이, 선 위쪽과 만주는 소련군이, 중국 본토는 중국군이, 싱가포르는 영국군이 점령한다는 계획에 따른 선이었다. 당시 일본은 일본 본토, 한반도, 만주와 중국 화북지역, 싱가폴, 필리핀, 동남아에 이르는 거대한 반원형의 땅을 차지하고 있어서 한 나라에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킬 수 없으니 미·영·중·소 네 나라가 분할 점령하자는 구상이었다.

미국이 소련에 이 안을 제의했다. 미국이 너무 많은 것을 차지했다고 반대할 줄 알었던 스탈린은 뜻밖에도 38선으로 나눈 한반도 분할점령에 동의했다.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 3천만 명 이상이 사는 땅, 수많은 형제의 마을이 갈렸고, 12개의 강, 75개 이상의 샛강, 딱 몇 개라고 숫자로 헤아리기 어렵게 많은 산봉우리, 181개의 우마차로, 104개의 지방도로, 15개의 국도, 6개의 남북간 철로가 잘렸다. 이렇게 생겨난 미·소 양국의 38선 분할점령이 이 나라 분단의 시초였다. 

스탈린이 38도선 분할점령 안을 흔쾌히 수락한 것은 독일-한국-일본을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분할 점령한다는 사고의 연장선상이었다. 연합국은 이미 독일·베를린을 분할 점령했으며,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후 최종적으로 일본을 분할 점령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는 일본이 전쟁 중에 차지한 나라들을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이 나누어 점령한다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사할린을 점령하기 위해 소련군 사단을 파견하려고 했다. 그러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강력한 저지로 소련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리고 전범국인 일본은 끝내 분단되지 않았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결정한 포츠담회담에 대해 일본은 최종안으로 ‘천황제 유지’를 제안했다. 이 제안에 대해 강대국들은 “최종 선택은 일본 국민의 뜻에 달렸다”고 명시해 일본의 자유 선택을 시사했다. 항복선언을 하면서 히로히토 일왕은 “연합국의 도타운 후의가 느껴진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결국 전범인 일본 왕은 처벌되지 않았고, 천황제는 유지되었다. 일본은 군정청이 실시되지도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에 의한 간접 통치를 받았지만, 주권이 부정되지 않고 자치가 허용되었다. 그 결과 전범재판, 재벌해체, 토지개혁, 노동개혁 등 민주화 개혁을 이뤘다. 식민지 그러나 한국은 분단되었고, 미군정이 들어섰다. 미군정은 한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범국 일본이 이렇듯 열강의 ‘도타운 후의’를 얻은 것은 일본이 국제사회에 긍정적 이미지를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외교·군사 전문가 중에 일본 사정에 정통한 지일파들이 적지 않았다. 국무부장관을 역임한 헨리 스팀슨 전쟁부장관은 교토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는 안에 반대했다. 1893년 신혼여행차 일본에 갔고 1929년에 국무장관으로 다시 도쿄를 방문했던 그는 일본의 정신적·문화적 도시인 교토를 파괴할 경우 일본인들의 적개심을 자극한다고 우려했다.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좋은 이미지 만들기 전략을 구사했다.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소련·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빼앗긴 일본은 열강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10년 후 러일전쟁을 앞두고 일본은 청일전쟁 당시보다 예산을 9배나 확대하면서 학연, 지연은 물론 일본 여성의 미국·영국 남성과의 결혼 등 모든 지일 전략을 구사했다. 미·영의 유명 정치인이나 외교관 중에서 일본인 아내를 둔 사람은 의외로 많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일전쟁에 앞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하버드대학 동문인 가네코 겐타로 법무상을 미국에 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영국과 미국의 많은 지일파들은 일본을 위해 일했다.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저서 <1945년 해방직후사>에서 “당시 한국의 미군정에서 일했던 미국인 중 훗날 회고록을 남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밝혔다. 한국에 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미군정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를 비롯해 미군정 인사들은 한국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고, 한반도 운영이나 미래를 보는 시각 등 자질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뜻이다. 

지난 30년간 우리나라는 K-컬처의 눈부신 성장으로 대외 이미지가 크게 상승했다. 우리 자체의 힘으로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뤘고, 그 힘으로 지구촌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문화의 힘을 내뿜었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정교한 관리보다는 거친 플레이가 자주 나타나면서 K-컬처의 확산이 답보상태에 있다는 인상을 준다. 대결적인 국정운영은 정치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사회·국제·외교의 전 분야에 거칠게 작용한다. 한국의 국제 이미지를 정교하게 관리하는 것에 더욱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임순만 작가·언론인 (전 국민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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