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전 언론인
임순만 전 언론인

[이코리아] 이승만 전 대통령을 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승만기념관을 만들자는 논란이 계속되고, 이 전 대통령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감독 김덕영)도 나왔다. 이 영화는 13일 현재 20만에 가까운 관객이 들었다고 한다. 다큐로서는 괜찮은 흥행 성적이다. 

최근 이 전 대통령과 관련한 논란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서로 일방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는 점이다. 일방적인 주장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역사에는 언제나 작용과 반작용이 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논쟁만 되풀이하게 마련이다. 이승만기념관을 만들자는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 다큐에서 말하듯 3.15부정선거조차도 “야당 후보인 조병옥이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만들면 그 반작용으로 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1960년 3.15 선거 당시 이승만은 85세의 고령이었다. 그래서 자유당에서는 대통령 유고 사태에 대비해 부통령 이기붕을 내세웠고,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위해 1년 이상 조직적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그런 역사를 이승만은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바꾸면 곤란하다.

다큐멘터리는 또 이렇게 주장한다.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준 것은 유럽 일부 국가를 앞서는 대단한 일이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미리 내다본 것은 시대적인 선지자였다’고. 그러나 이런 주장도 동의하기 어렵다. 여성참정권은 1919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당시 임정 헌법인 임시헌장에서 명문화 했던 조항이다. ‘중·일전쟁이 불가피하다’ ‘미·일전쟁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주장도 특별한 선지자의 관점이 아니었다. 당시 독립운동가 대부분은 중일전쟁과 미일전쟁에 대비해 연합군에 참여할 우리군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남한의 토지개혁 때문에 남북한의 경제가 오늘날과 같이 달라졌다’는 식의 주장도 납득하기 곤란하다. 당시 북한의 토지개혁은 남한보다 먼저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한의 토지개혁은 불가피했던 것이 상황이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역사학계에서 학문(논문)의 성과를 인정받는 주류학자들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인가. 다양한 배경이 있는 역사적 사안을 한쪽으로만 말하면 곤란하다.

이승만의 공과를 살펴보자. 먼저 이승만의 공로. 첫째, 이승만은 세계 정치를 장악할 정도의 힘을 가진 미국 정치무대에서 자기 목소리를 갖고 활동한 우리나라 정치외교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다. 세계 정치의 한복판에서 주요 인물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이승만은 우리 5천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외교적 인물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는 앉으면 쓰고, 서면 연설할 정도로 대단한 애국적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주권이 없는 나라의 이름 없는 망명객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한계에 머물지 않고 최초의 한국인 정치학 박사가 돼 한국이 독립해야 할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에게 탄원했다. 그는 멈출 줄 모르는 기관차와 같았고, 미국 조야에서 많은 동조자들을 얻었다. 그가 역사와 관점이 다른 머나먼 미국 땅에서 흘린 ‘시대의 땀’은 제대로 조명해야 마땅하다. 다만 그가 최초의 미국박사라고 해서 천재적인 학업성적을 보였다고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 1905 가을학기부터 1907년 6월까지 2년간 수학한 조지워싱턴대에서의 학업성적은 A가 단 한 차례 있었고, 주로 C, D, E, F 기록했을 만큼 미국 대학생들의 평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좋지 않았다. 하버드대학원 석사과정 시절에도 학점은 B와 C가 대부분이었고, 낙제인 D(경제학)도 있었다.

둘째 이승만의 뛰어난 저술능력을 꼽고 싶다. 그는 고종 폐위 음모사건으로 1899년에 수감된 이후 한성감옥에 일종의 도서관인 서적실을 만들었고, 5년 7개월의 감옥생활 동안 20대 후반의 나이에 2년 3개월 동안 일간신문(제국신문)에 논설을 집필했다.(정확히 몇 편의 논설을 썼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는 세계언론사에도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인데, 이런 저술능력은 훗날 <만주의 한국인>과 <일본내막기>에서 꽃을 피웠다.  

상해 한국임시정부는 대통령에서 탄핵 돼 미국으로 돌아간 이승만을 1932년 국제연맹총회에 전권 특명대사로 제네바에 파견했다. 이승만은 제네바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해 운동을 펼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제연맹의 회의 주제는 일본의 만주점령에 대한 것이었고, 국제연맹에서 만주의 실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리턴조사단의 보고서가 발표될 예정이었다. 한국의 독립을 주제로 한 연설과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이승만은 주제를 <만주의 한국인>으로 바꿔 만주의 역사와 한국인들의 실상을 담은 소책자 한 권을 만들었다. 불과 며칠 만에 제작된 이 책자를 보면 이승만이 평소에 얼마나 준비를 많이 한 사람인지, 역사와 국제정치를 꿰뚫는 그의 식견이 얼마나 탁월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셋째, 이승만의 장점은 미국 조야에 형성한 폭넓은 인맥과 국제정치 감각에 있다. 비록 미국대통령이나 국무부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이승만의 서신을 무시했고, 접수조차 하지 않고 거부했지만, 이 당시 형성한 미국 조야의 인맥과 국제적 안목은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됐을 때 많은 힘이 되었다. 미국에 대한 이해력과 국제정치감각으로 인해 이승만은 연합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초대 대통령에 이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과실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이 남한 단독정부 추진이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南方)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 1946년 6월 3일 정읍 유세에서 이승만이 한 ‘남한단정론’은 918년 왕건이 고려를 통일한 이후 1000년이 지나 처음으로 터져 나온 분단 발언이다. 당시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끝나지도 않은 상황이었고, 미소공위가 별다른 효력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내 나라 정치인의 입으로 할 수 있는 발언은 아니었다. 

최근에는 이 발언이 당시 북한이 돌아가는 사정을 볼 때 소련과 북한공산당을 막아낼 수 있는 애국발언이었다고 하는 논자들도 있지만, 이는 견강부회일 따름이다. 먼저 침공한 사람이 침략자이듯이, 단정을 발언하고 추진한 사람이 분단주의자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다.

둘째, 어렵사리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승만은 너무나 많은 독재정치로 치달았다는 사실이다. 국회에서 2년으로 정한 반민족행위특별법의 기한을 1년으로 단축시킴으로써 친일 인사 청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통치 12년 기간 내내 부산정치파동·발췌개헌·사사오입개헌·진보당사건·3·15부정선거 등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독재정치를 펼쳤다. 그로 인해 이승만은 대한민국헌법 전문에서 법통을 지닌 것으로 밝히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탄핵된 대통령이자,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항쟁으로 축출된 대통령이라는 역사의 치욕을 기록했다.

셋째, 이승만은 친구가 없었기에 그의 실정(失政)을 바로 잡아줄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시절 ‘3만’이라고 불렸던 혈맹의 동지 정순만, 박용만과 모두 적대적인 사이가 되었다. 안창호와도 적대적인 사이였으며, 자신을 추종한 김구와도 끝내 정적이 되었다. 이승만은 탁월한 대중조작 능력의 소유자였고 초기 지식인 기독교인으로서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능력이 자신보다 좀 못 미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야멸차게 대했다. 대통령이 된 이승만에게 아첨꾼은 많았지만 끝까지 그와 함께 한 동지는 없었다. 

1925년 이승만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탄핵될 당시 그 사유를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당시 신규식과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발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미국의 보호를 전제로 한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은 매국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청원외교의 효시가 되는 그의 청원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문제가 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일천오백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고, 또 이 회의에 모인 연합국 열강이 장래에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현재와 같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조선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저희들의 자유 염원을 평화회의 석상에서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한반도는 모든 나라에 이익을 제공할 중립적 통상지역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 청원서는 “조선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를 청원했다는 측면에서 문제가 됐지만, 당시 국제정치 역학상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중립적 상업지역’ 개념은 이승만의 프린스턴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의 논지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당시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도 비슷한 내용의 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지만, 이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요인은 1919년 4월 임정 대통령으로 추대됐지만 상해로 와서 부임하지 않고 미국에서 머물렀다는 것과, 미국동포들이 독립운동에 쓰라고 보낸 돈을 혼자서 사용하고 출처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점, 상해에 지인이 없었다는 점 등이 큰 요인이다. 미국동포들이 모금해 보낸 돈 중에서 이승만이 임시정부에 보낸 돈은 18%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이승만은 ‘외톨이 박사’였으며, 사람을 품을 줄 모르는 정치인이었다.

이외에도 이승만의 공과는 참으로 많다. 독립운동기에 미국에서 45년 이상을 활동했으며, 해방 이후 한국에 돌아와 3년, 대통령으로 12년간을 지냈기에 그에 대한 중요한 자료는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역사는 땅의 잔주름을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다 날려버리고, 커다란 산맥만을 기록한다. 그렇더라도 역사적 인물들의 미세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생동하는 역사를 만들기 때문이다.

진영의 감정이나 호불호에 얽매여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훗날의 역사에 죄악을 남기는 짓이다.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바른 역사를 기록하기를 기대한다. 

임순만 전 언론인 (작가·국민일보 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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