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지난여름에 키워 지인에게 선물한 페퍼민트 - 모종의 시기를 지나 어느 정도 잘 자라고 있다.사진=이송용 필자 제공.
필자가 지난여름에 키워 지인에게 선물한 페퍼민트 - 모종의 시기를 지나 어느 정도 잘 자라고 있다.사진=이송용 필자 제공.

 

[이코리아] 독일에서 10년 간 살면서 자녀 둘을 독일 교육체제에서 교육시키고 있는 최수정 칼럼니스트는 “독일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나고 학교를 다니면서 ‘경쟁’, ‘비교우위’라는 단어를 듣지 않고 자란다”고 역설한다. 그렇기에 만일 어떤 부모가 자신의 자녀에게 과도한 경쟁체제의 당위성을 가르친다면 그 아이의 부모는 언젠가 학부모 상담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 지점에서 한동안 골똘해진다. 독일의 교육은 협동과 팀워크를 가르치는 데에 주안점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의 교육은 오히려 무한 경쟁을 종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반성하게 된다. 

필자는 교육 현장에서 불필요한 경쟁을 배제하고 협동과 상생을 가르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오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 절대 경쟁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류’의 편협한 생각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다. 살다 보면 불가피하게 경쟁이 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시장에 만 원에 팔리고 있는 물건이 있는데, 누군가 노력해서 그 물건을 구천 원에 팔 수 있다면, 그래서 소비자에게 더 나은 선택권을 주고, 자신 역시 수익을 얻는다면, 누가 종류의 경쟁을 나쁘다 하겠는가?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는 좀 더 신중하고 지혜로운 접근이 필요하겠다. 먼저 배려하고 상생을 추구하도록 가르친 이후에 어쩔 수 없는 경쟁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도록 가르쳐도 전혀 늦지 않다. 우리 사회에는, 아이들이 일찍 경쟁에 노출되면 사회성을 기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한데, 나는 그런 생각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봄에 밭에 여러 종류의 허브들을 심었던 일을 회상해 본다. 밭의 여느 잡풀들에 비해 얼마나 싹이 늦게 나던지……. 어렵게 기다려서 싹이 났는데, 그것들은 매우 작고 약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또 어찌나 천천히 자라던지 가만히 두면 주위의 풀들이 그 녀석을 다 집어 삼킬 기세였다. 물을 주고, 풀을 뽑아 주고, 기다리는 일을 반복하기를 하세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지에 뿌린 것들 중에 살아남은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비닐하우스 안의 모종 포트에서 따로 길렀던 허브들이 잘 자라, 어느 정도 큰 후에 밭에다 옮겨 주었더니, 여름을 나고 가을을 나서 날이 꽤나 추워 진 지금까지도 푸른 잎을 내며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그를 괴롭히던 그 모든 풀들은 다 시들었는데도 말이다. 바로 어제도 페퍼민트 잎을 따서 차를 끓여 손님에게 대접했는데, 얼마나 신선하고 향내 가득하던지……. 

작물을 키워 보면, 모종의 시기가 중요하다. 그 시기는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시기이다. 봄에 심는 작물을 기준으로 보자면, 일단 온도가 중요하다. 처음부터 강하게 키운다며 찬바람에 마구 노출시킨다고 작물이 알아서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농부들은 알고 있다. 그런 식으로 작물을 키우면 농사를 망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의 어린 자녀들이 따뜻한 사회를 경험하고 자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온실 속의 화초’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모든 생명에게는 어떠한 형태로든 온실의 시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우리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더불어 모종 시기의 경쟁은 백해무익하다. 빽빽하게 심어서 경쟁을 시키면, 대다수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시들 뿐만 아니라 경쟁을 이기고 나온 녀석이라 해도 길쭉하고 비실하게 자라 튼실하지 못하다. 

혹자는 잘 자란 녀석만 솎아 주면 되지 않느냐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 동의한다. 다소 촘촘하게 심어 일정 기간 후에 경쟁에서 이긴 녀석만 남기고 솎아내는 것도 농사법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건 식물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사람끼리 경쟁을 붙여 이긴 사람만 남기고 솎아낸다고 하면 그에 수긍할 이가 얼마나 있을까? 혹 누군가 식물이 아닌 동물을 가지고, 예를 들어 강아지를 가지고 그런 일을 벌인다면, 그는 사회적으로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하다. 하물며 사람이랴.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교육은 그런 우생학적인 방법론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어 보인다. 아주 어려서부터 외모, 키, 학습 속도, 심지어 아이가 밥 먹는 속도나, 부모의 아파트 평수에 이르기까지, 삶의 거의 모든 요소에서 아이들은 경쟁의 트랙 위에 올려진 채 비교된다. 그리고 거기서 살아남은 이들이 명문대에 가고 대기업에 갈 것이라 여겨진다. 그들만이 승자일 것이고, 그들만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어디에서도 승자를 찾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어 간다.  

이 시대의 많은 어린이들과 청소년, 청년들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데에는 우리 사회의 책임이 있다. 특별히 그 아이들을 경쟁의 사지로 내모는 부모와 교사들의 책임이 막중하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면, 우리로부터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비교하고 경쟁시키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행복하고 알찬 교육을 가정과 학교에서 충분히 이뤄낼 수 있다. 

한 가지 예만 소개하고, 다음 글들에서 이어 가고자 한다. 

나의 가정과 공동체에서 부모와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사용하지 않는 말이 있다. 우리 자체가 그 말을 수도 없이 듣고 자란 터라 어떤 상황이 되면 의도치 않아도 자동으로 우리 입에서 튀어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한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자, 누가 먼저 하나 보자!”

선 긋는 일을, 달리기를, 밥 먹기를, 누가 먼저 하는가가 정말로 그렇게 중대한 일일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자. 독자들의 답은 “아니다”일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옳다 생각하는 대로 함께 실천해 가자. 

[필자 소개] 이송용 순리공동체홈스쿨 교장, 전 몽골국제대학교  IT 학과 조교수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