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무구조도의 개념도. 자료=금융위원회
책무구조도의 개념도. 자료=금융위원회

[이코리아] 중대한 금융사고 발생 시 금융사 경영진에게 책임을 묻는 ‘금융판 중대재해처법’이 연내 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금융권이 술렁이고 있다. 금융사고 기준이나 책임의 범위, 대상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되지 않은 만큼, 법 시행 전 금융권의 우려가 반영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27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은행장 간담회에서 “지난주 정무위 법안소위에서 지배구조법 개정안이 통과됐다”며 “개정을 추진한 이유는 ‘은행이 소비자 이익을 희생해 불법·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경영진이 명심하고, 전 직원과 공유토록 제도적 뒷받침을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언급한 법안은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으로도 불리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하 지배구조법) 개정안이다. 윤한홍·강민국 국민의힘 의원과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한 지배구조법 개정안은 지난 21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상정됐는데, 정무위는 세 안을 병합한 위원장 대안을 전체회의에 올리기로 했다.

지배구조법 개정안은 금융사 내부통제에 대한 이사회의 감시 역할을 강화하고 내부통제 관련 책무를 배분한 '책무구조도'를 금융위원회에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행 지배구조법은 금융사 경영진에게 내부통제 기준을 ‘마련’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지만, ‘준수’할 의무는 부과하지 않고 있다.

실제 금융당국은 지난 2021년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상품(DLF) 사태와 관련해 손태승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에게 중징계를 부과했으나, 결국 손 전 회장이 제기한 징계 취소 소송에서 패소했다. 금융당국은 손 전 회장이 내부통제기준 준수 의무를 위반했다며 징계를 내렸지만, 법원은 준수 의무 위반을 제재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하지만 개정안이 통과돼 금융사에 ‘책무구조도’가 도입되면, 금융사 임원의 내부통제 책임이 명확해지는 만큼, 내부통제 관리 부실 및 미준수에 따른 제재도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개정안의 핵심인 ‘책무구조도’는 금융사 임원이 맡은 역할을 사전에 배분해 개별 임원의 의무·책임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대표이사를 포함한 임원에게 내부통제 관리의무의 책임 범위를 사전에 획정해주는 문서다.

개정안은 금융사 CEO에게 책무구조도 작성·보고 의무를 부과하는 한편, 금융위원회가 내부통제 관리의무를 위반한 금융사 임원을 징계할 수 있도록 했다. 금융사 CEO 또한 금융사 내에서 조직적·장기간·반복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는 시스템적 실패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지배구조법 개정안이 정무위 문턱을 넘으면서 금융권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최근 불완전판매·횡령 등 금융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금융사 내부통제 강화가 필요하다는데 여야 이견이 없는 만큼 개정안이 연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가능성도 더욱 커졌다. 

금융권은 금융사고 발생 시 금융사 경영진을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이 시행되면 경영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금융투자협회는 개정안과 관련해 “자율규제영역인 내부통제절차 위반을 이유로 규제를 확대하는 것은 회사내규 위반에 대한 행정제재를 용인해 자율규제영역에 외부개입을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이로 인해 금융회사 임원의 경영 판단 상 위험회피성향이 강화돼 궁극적으로 금융혁신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책무구조도가 새로 도입되는 만큼 제도 적응 과정에서 일어날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은행연합회는 국회에 “책무구조도는 국내에 처음 도입되는 생소한 제도이므로 하위법령에서 세부 작성 기준 제시가 필요하며, 모범사례가 집적되는 상당 기간 동안은 제재보다 컨설팅 위주의 지도·감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반면, 지배구조법 개정안이 통과돼도 금융사고 예방 효과를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개정안의 핵심인 책무구조도는 영국 사례를 참고한 것인데, 영국에서도 해당 제도를 위반해 금융사 고위 임원이 처벌을 받은 경우는 드물기 때문. 

영국은 지난 2016년 고위 관리자 인증 제도(SM&CR)를 도입하고 각 금융사에 책무구조도를 마련할 의무를 부과했는데, 지난해 3월 기준 고위관리자에 대한 제재는 단 4건에 불과했다. 책무구조도가 도입되더라도 금융당국이 적극적인 감시·제재에 나서지 않을 경우 제도의 효과를 충분히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한편,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법 시행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 제도가 되도록 여러분과 협의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법사위와 본회의를 남겨둔 지배구조법 개정안이 금융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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