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픽사베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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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리아] 인도네시아어에서는 상황에 따라 인칭 구분이 달라진다. 격식이 있는 자리라면 우리말의 ‘저/당신’에 해당하는 ‘사야/안다’가 사용된다. 예를 들어, 수업 시간이라든가 회의 시간이라든가 업무 시간에는 서로 ‘사야/안다’를 사용하며 격식을 갖춘다. 이때 화자간의 나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상황이 바뀌었을 때 인칭 표현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사야/안다’를 사용하는 공식적인 시간이 끝나고 개인적인 만남으로 상황이 전환되면 그때부터는 우리말의 ‘나/너’에 해당하는 ‘아꾸/까무’를 사용한다. 격의 없는 표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대학에서 열 살 나이 차가 나는 교수 두 명이 있는데 서로 친구다. 그 둘이 사무실에서 만났다면, 이렇게 대화한다. (우리말로 번안했기에 딱 이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의미적으로 이런 대화라 이해를 해 주시면 좋겠다.)

A(서른 살): “안녕하세요? 제가(사야) 어제 오후에 이메일 보냈는데 확인하셨나요?”

B(마흔 살): “아, 제가(사야) 어제 월차라서 당신이(안다) 이메일을 보냈는지 몰랐네요. 오늘 확인해 볼게요.”

그 후 점심 시간이 되어 방금 그 두 사람이 교직원 식당에서 만나 함께 점심 식사를 한다. 그때는 대화가 이렇게 달라진다. 

A: “너(까무) 어제 월차였다면서 무슨 일 있었어?”

B: “아, 이사하느라고. 너(까무)도 얼마 전에 이사하지 않았던가?”

A: “맞아, 나(아꾸)도 그래서 월차 썼었지.”

열 살 차이가 나는 교수 둘이 직장에서 일하며 친구가 되었다. 그렇다고 불알친구는 아니다. 그런데 그 둘이 업무적인 상황에서는 서로 존대를 하다가 사적인 상황으로 전환이 되면 소위 야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생경한 장면이었다. 우리 문화에서는 대개 나이나 직급에 따라 존댓말 사용 여부가 결정되고, 그렇게 한 번 결정된 어투는 공적인 대화든 사적인 대화든 상황에 관계 없이 대체로 유지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수직적 위계 관계 속에서 존댓말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서로 평등한 관계 속에서 상황에 따라 존댓말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니, 나는 그런 인도네시아 문화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느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들이 서로 관계를 맺어가는 일을 곁에서 지켜보다 보면, 일상에서 서로 반말을 사용하는 문화가 작은 갈등을 쉽게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J: “어? 이거 내가 먼저 놀던 거야.” 

K: “아니거든, 지금 내가 하고 있거든.”

J: “야, 내가 먼저라니깐!”

K: “아니라니까!”

여섯 자녀들을 홈스쿨링으로 키워 내며, 나는 자녀들에게 서로 존댓말을 하도록 가르쳐 오고 있다. 또한 순리공동체홈스쿨의 교장으로서 우리 교육 공동체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도록 지도해 오고 있다. 그랬더니 자녀들 사이의 사소한 갈등이 큰 대립으로 번지는 패턴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예를 들면 교육 공동체에서는 아이들 간에 이런 대화가 일어난다.

J: “우리 같이 야구 할래요?”

K: “어? 나는 축구 하고 싶어요.”

J: “그럼 우리 축구 먼저 하고 야구 합시다.”

선비들이나 할 법한 대화를 웬 어린이들이 하고 있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자면, 참으로 아름답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곤 한다.  

공교육에서도 학생들 사이에 서로 경어를 사용하도록 하는 시도가 꾸준히 있어 왔다. 몇몇 초등교사가 학급 학생들에게 제안하여 반에서 학생들이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도록 학급을 운영했는가 하면, 때로 학교 단위로 한 학교 전체가 그런 시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들 간의 호칭 역시 선후배를 불문하고, 이름에 ‘님’자를 붙여 “△△ 님”으로 부르도록 지도하기도 한다. 그런 사례들의 결과 역시 비슷하다. 학생들 사이의 갈등이 줄어들었고,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 학급에서는 학생들에게 그런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교사들도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쓰며 노력한다. 나 역시 나의 자녀들에게 (주로) 존댓말을 쓴 지 오래 되었다. 반존대가 되는 때도 많지만, 가능한 나의 언어가 그들의 언어와 다르지 않고, 그들의 언어가 나의 언어와 다르지 않도록 노력한다. 

어른을 대하는 말투와 아이들을 대하는 어투가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 그것이 내가 교육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평등 사회이고 대동 사회이다. 

[필자 소개] 이송용 순리공동체홈스쿨 교장, 전 몽골국제대학교  IT 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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