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개발은행의 자금세탁방지 플랫폼 '크루즈'의 우선순위 필터링 모델 작동방식(위) 및 네트워크 링크 분석 모델 화면. 사진=우리금융경영연구소
싱가포르개발은행의 자금세탁방지 플랫폼 '크루즈'의 우선순위 필터링 모델 작동방식(위) 및 네트워크 링크 분석 모델 화면. 사진=우리금융경영연구소

[이코리아] 대형 금융사고의 빈번한 발생으로 금융권에 내부통제 강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감독당국이 요구하는 규제 수준이 점차 높아지고 복잡화되는 만큼, 첨단기술을 도입한 ‘레그테크’(Regtech)를 통해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레그테크는 규제(Regulation)와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금융기관이 감독당국이 요구하는 규제를 준시·이행하기 위해 인공지능(AI) 등의 첨단기술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전환으로 핀테크·빅데이터 등 금융의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새로운 규제가 늘어나고, 거래량의 폭증으로 소수 인력이 새로운 영역에서 늘어나면서 동시에 신규 규제가 증가한 데다 금융거래량도 폭증해 소수의 인력으로 관련 업무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만큼, 첨단기술을 통해 이를 자동화함으로써 규제 위반 리스크를 최소화하자는 것.

실제 국내 금융권은 최근 수년간 DLF 및 라임·옵티머스 사태 등 잦은 대형 금융사고로 인해 배상비용 부담 및 금융소비자 신뢰 하락 등의 문제를 겪고 있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은 지난 22일 금융사고 예방을 위해 금융사 임원의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의 ‘금융회사 내부통제 제도개선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해당 개선안에는 ▲임원별로 내부통제 책임을 배분한 ‘책무구조도’ 작성 ▲최고경영자(CEO)에 책무구조도 작성 및 내부통제 총괄 관리 책임 부여 ▲이사회의 내부통제 관련 심의·의결 사항 추가 및 내부통제위원회 신설 등의 내용이 담겼다. 특히, 금융사 내에서 조직적, 장기간 반복적 또는 광범위한 문제가 발생하는 등 내부통제 시스템적 실패(systemic failure)에 대해서는 CEO에게 책임을 묻기로 했다. 개별 금융사고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기존 논의보다는 후퇴한 방안이지만, CEO에게 내부통제 관리 책임을 지우는 방안이 처음 제도화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처럼 내부통제로 인한 비용 부담뿐만 아니라 처벌 리스크도 커지면서, 금융사로서도 인력만으로 규제 업무를 감당하기에는 리스크가 지나치게 커졌다. 이 때문에 금융사가 AI 등 첨단기술을 활용해 규제 준수를 자동화하는 ‘레그테크’에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국내에서만 제기되는 주장은 아니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디지털 내부통제 체계 사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20년 기준 내부통제 위반으로 금융사에 부과된 벌금은 무려 142.1억 달러(약 19조원)에 달한다. 이처럼 규제 비용 부담이 가중되면서 글로벌 금융사들은 레그테크를 효과적인 규제 대응 수단으로 주목하고 있다. KPMG가 22일 발간한 ‘2022 핀테크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레그테크에 대한 투자는 186억 달러로 전년(118억 달러) 대비 68억 달러(57.6%)나 증가했다. 보고서는 “기업들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컴플라이언스 의무를 준수하며 비용 절감 등을 모색하면서 레그테크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글로벌 금융사는 이미 레그테크를 통해 점차 복잡해지는 규제에 대응하고 있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싱가포르개발은행(DBS)은 지난 2019년 머신러닝과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한 자금세탁방지(AML) 플랫폼 ‘크루즈’(CRUISE)를 구축했다. DBS는 ‘크루즈’를 통해 ▲경고 사항의 위험 수준을 평가해 업무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규제 업무 담당자가 관련 거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분석결과를 시각화하며 ▲필요 데이터를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60개 시스템의 데이터를 통합 관리하고 있다. 이를 통해 분석가능한 의심거래량 규모가 기존 대비 약 33% 증가한 데다, 의심 거래를 조기 식별해 불법행위를 빠르게 적발할 수 있게 됐다. 

제이피모건(J.P.Morgan) 또한 지난 2016년 인공지능을 활용한 계약서 검토 소프트웨어 ‘코인(COiN)을 도입했다. ’코인‘은 기계학습으로 제작된 자연어 처리와 이미지 인식 기술을 활용해, 법률 문서를 해석하고 주요 내용을 추출하는 작업을 자동화했다. 이를 통해 제이피모건의 대출 계약서 검토작업 속도는 연 36만 시간에서 불과 몇 초 안으로 단축됐으며, 검토의 정확도 또한 획기적으로 향상됐다.

국내에서도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을 활용한 내부통제 강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은행은 지난 2019년부터 인공지능 기반 이상거래감지시스템을 운영 중이며, 2020년부터는 보이스피싱 모니터링, 자금세탁방지, 불완전판매 적발, 수출입 선적서류 검토 등에도 관련 기술을 확대 적용하고 있다. KB국민은행 또한 영업점 내부통제 강화 방안의 일환으로 자금세탁방지 업무 지원 챗봇(2020년)과 스마트 시재관리기(2021년)을 도입한 상태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는 “구식기술 적용과 데이터 산재로 인해 업무 혼선과 비효율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술 동향을 지속 팔로우업 하여, 최신 AI 등 신기술로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정기적으로 데이터베이스를 재정비해야 한다”라며 “여신과 상품판매 등 리스크 발생 우려와 대고객 피해가 큰 영업업무의 경우, 해당 업무에 특화된 계약서 검토 AI를 추가·업그레이드하는 등 시스템을 보완해 금융사고를 철저히 예방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연구소는 이어 “현업부서와 준법부서 간 협업이 필요한 내부통제 프로세스를 효율화하기 위해, 관련 부서가 규제 준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공동작업 시스템과 AI 툴(Tool)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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