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전 언론인
임순만 전 언론인

[이코리아] 다시 교육현장이 들끓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5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업무를 보고받고 “수능과 관련해 변별력은 갖추되 학교 수업만 열심히 따라가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출제하고 그 외 내용은 출제에서 배제하라”고 지시한 여파다. 대통령의 지시가 나오자 여권은 당정 협의를 열어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교육부 담당 국장이 교체됐고, 수능 출제를 담당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도 사임했다. 

수능이 지금까지의 방향에서 바뀐다고 하니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 등 교육 현장에서는 올해 수능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다. 논란이 거세지자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이 장관에게 물수능·불수능을 얘기한 것이 아니다”라며 “변별력은 갖추되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는 수능에서 배제하라는 취지였다”라고 해명했다. 이주호 장관은 당정협의회 이후 기자들을 만나 “그동안 대학교수도 풀지 못할 정도로 (킬러) 문제를 내고 그런 사례가 많았다”며 “이런 것은 정말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MB 정권때 교육수장으로 있었다. 킬러문항(초 고난도 문항)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가 이제와서 “정말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미덥지 않다. ‘킬러 문항’이라고 하면 자극적인 어감 때문에 학생들에게 시도해서는 안 될 비교육적인 출제 관행인 것처럼 비치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느낌이 강한 단어를 사용해서 그렇지, 변별력을 가리기 위해 문제에서 문항의 난도를 조절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등급을 산출해야 하는 시험에서 누구나 맞힐 수 있는 쉬운 문항을 출제하면 해당 등급의 학생들이 모조리 손해를 본다. 

문제는 이런 지침을 실행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에 있다. 수능을 불과 150일 남긴 시점에서 이른바 킬러문항을 빼고 출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누가 객관식 5지선다 문제에서 문항을 평이하게 제시하면서 복수 정답이 나오지 않고, 편법을 사용하지도 않고, 변별력도 높이는 출제를 자신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랜 실험을 거쳐야 하는데 수능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엄청난 문제를 야기해 사회가 대혼란에 빠질 수 있다. 변별력은 수능의 전제조건이다. 수능은 상대평가를 위해 등급과 표준점수, 백분위가 산출되는 ‘줄 세우기 시험’이다. 이런 시험에서 난도가 있는 문항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런 것을 킬러 문항이라고 찍어 내리면 누구도 자신 있게 출제하지 못할 것이다.

과거 수능 출제를 책임져 본 경험이 있는 출제위원장과 평가원장 출신 전문가들도 킬러 문항 없이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은 매우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킬러 문항으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난이도를 유지하려면 상당한 실험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시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해법이 나오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수능이 교육과정 밖에서 출제되는 것도 아니다. 수능은 교과과정 내 출제가 기본이다. 2019학년도부터는 어느 교육 과정에서 출제를 한 것인지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수능시험 문제에 대해 각 문항마다 교육과정 성취기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문항별 출제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교육과정 밖에서 출제했다거나 오류가 있다는 논란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학이 입시 정책을 바꿀 때는 고등교육법과 그 시행령에 따라 3년 전에 예고해야 한다는 '대입 3년 예고제'가 시행되고 있다. 국민들이 대입시에는 그만큼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런 터에 갑자기 지난해까지의 방향과 기조가 바뀐다면 학교 현장은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이제와서 올해 수능이 과거와는 다른 방향으로 출제된다면 정부의 생각과는 반대로 학생들은 공교육을 외면하고 입시학원 등 사교육으로 달려갈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와 중고등학생 학업성취도는 세계에서도 알아준다. 국제수학연맹(IMU)은 지난해 2월 한국의 국가 수학 등급을 최상위 등급인 ‘5그룹’으로 승격했다. 한국은 1981년 ‘1그룹’으로 가입한 뒤 41년 만에 최고 등급에 올랐다. 5그룹 국가는 현재 12개국뿐이다. 3년마다 시행되는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는 최근의 조사 발표는 코로나19 유행으로 미뤄지고 있지만, 2018년 평가까지 한국은 줄곧 수학을 비롯해 모든 과목에서 최상위 집단에 들어가는 학업성취도를 자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 내부에서는 입시제도와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 대한 비판이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교육정책에 변화를 가하려면 정책의 진행과정과 학교교육의 실태를 면밀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마디씩 하면 파란을 부르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교사와 학부모들은 상당수가 대입 관련 고도의 ‘기술자’들이다. ‘대학교수도 풀지 못하는 킬러문항!’ 교육 당국자들 사이에서 이렇게 날렵한 말이 흘러 다녀서는 곤란하다. 어떤 대학교수가 어떤 과목의 수능문제를 풀어봤다는 것인가. 

과거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서울대 통합논술 예시문제를 보고 자신도 쉽게 논술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며 이런 통합논술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 비판해 통합논술이 된서리를 맞은 적이 있다. 이 전 장관이 통합논술 문제를 받고 어려워하는 당연하다. 통합논술은 준비한 사람만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만능 재담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통합논술은 학교 교과에서 터득한 지식과 논리력, 문해력과 인문학적(이과는 수리적) 종합력을 요구하고 있고 정부의 감사에 대비해 대학 당국이 철저하리만큼 채점의 계량화까지 고려한 방식이었다.

대통령의 발언은 극도로 절제되고 신중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말에도 교육부의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초중고 12학년제를 유지하되 취학 연령을 1년 앞당기는 방향을 신속히 강구하라”라고 지시해 학부모와 교육계의 엄청난 반발을 산 바 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의 교육까지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정책을 아무런 대안도 없이 내놓으면 곤란하다.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습관성으로 불쑥불쑥 한마디씩 내뱉는 교육 관련 발언은 교육 현장에 엄청난 부담을 안긴다. 지난해에는 교육부 장관이 사퇴했고, 이번에는 담당 국장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물러났다. 교육 문제는 오랫동안 연구해온 사람들이 우리의 역사와 실정에 맞게 하나하나 풀어가고, 정치권에서는 제대로 일하도록 힘을 모아주는 것이 답이다.

임순만 작가 · 전 국민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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