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가격. 자료=네이버 금융
구리 가격. 자료=네이버 금융

[이코리아] 세계 경제를 정확하게 반영해 '닥터 코퍼(Dr. Copper·구리 박사)'로 불리는 구리 가격의 하락세에 글로벌 경제에 대한 우려감도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구리의 최대 수요처인 중국의 미미한 경기 반등을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23일(현지시간)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거래되는 구리 가격이 톤(t)당 8000달러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지난해 11월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최근 한 달 새 11% 급락한 수치로, 올해 고점 대비로는 16% 하락한 것이다. 3개월물 구리 가격은 24일 LME 기준 전일 대비 0.64% 떨어진 톤당 7910달러를 나타냈다. 

구리는 실물경제의 선행 지표로 불린다. 전기, 전자, 통신, 건설 등 각종 산업 분야에서 구리가 필수적으로 사용돼 경기 회복기에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닥터 코퍼'(Dr. Copper·구리 박사)라는 별칭도 이 이유에서 붙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구릿값의 하락이 중국의 경기 반등이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원자재 섹터와 다르게 비철금속 수요 부문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이상으로 높다. 

LME 구리 가격은 지난해 3월에 톤당 1만600달러이상으로 정점을 찍은 다음 같은 해 7월 7000달러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 완화에 따른 구리 수요 회복 기대감으로 11월과 1월 사이에 구릿값이 저점 대비 30% 이상 반등하는 데 도움이 됐다. 

영국의 원자재 중개업체 마렉스의 금속 전략가 알 먼로는 “지난 수 년 동안 올해만큼 상황이 심각한 적은 없었다”며 “서방 국가들의 경제 성장이 계속해서 둔화하는 가운데 구리 강세장 시나리오는 실현되지 않은 중국 경기 회복에만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발표된 중국 실물지표는 예상보다 부진했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4월 산업생산은 전년동기대비 5.6% 증가했는데, 철강 생산은 4.3%에 그쳤다. 고정자산투자의 경우 전년동기 대비 4.7% 증가했는데, 인프라투자는 8.5%로 전월에 비해 증가세가 둔화되었고 부동산투자는 -6.2%로 전월에 비해 감소폭이 확대되었다. 

예상보다 부진한 경제지표 발표로 원자재 시장 내 경기민감 원자재인 에너지와 비철금속 섹터 가격 하락이 두드러졌다. 4월말 대비 CRB 원자재지수는 -2.25% 하락했는데, 에너지와 비철금속 섹터는 각각 -4.11%, -4.75% 하락했다.

이와 관련 대신증권은 향후 중국의 수요 견인 효과가 원자재 섹터 내 차별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소현 대신증권 연구원은 "에너지 부문의 경우 4월 중국 경제지표에서 나타났듯이 경제 재개방 본격화에 따른 수요 견인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면서도 "하지만 비철금속의 경우에는 중국 정부의 경기부양 효과가 확인되어야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브로커 스톤엑스의 비금속 분석가인 나탈리 스콧-그레이는 "구리 가격이 거시 경제적 요인보다는 수요 약세의 실제 징후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또 구릿값의 현·선물 격차를 초래한 것은 변화의 속도이며, 서방 국가들의 구리 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쪼그라든 탓이라고 덧붙였다. 

구리 수요가 정체된 반면 공급은 비교적 원활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페루 등 남미 국가들에서 반정부 시위로 인한 공급 부족 우려가 불거졌지만, 최근 들어 완화되는 추세다. 콩고민주공화국 텐케 풍구르메 광산(TFM) 관련 세금 분쟁도 매듭이 지어졌다.

또 달러화 강세도 구리 가격 하락에 일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리가 달러화로 거래되기 때문에 달러 가치가 오르면 수요가 감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이달 들어 현재까지 2%가량 상승했다.

이 같은 흐름으로 인해 구리의 현물 가격이 급락하면서 3개월 만기 선물 가격과의 격차도 확대되면서 슈퍼 콘탱고 현상이 발생했다. 

원자재 시장의 경우 현물 가격이 선물 가격을 밑도는 상황을 '콘탱고(contango)'라고 한다. 이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원자재를 보관하는 비용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물 가격이 선물 가격을 일반적인 범위를 벗어나는 수준으로 하회하면 '슈퍼 콘탱고(super-contango)'가 발생한다. 

런던 금속 거래소에 따르면 22일 기준 3개월 만기 선물 가격과 현물 가격의 차이는 66달러로 벌어졌는데, 이는 지난 2006년 이후 가장 큰 격차다. 

그렇다면 구리 가격의 향후 전망은 어떨까. 

월가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지난 21일 올해 구리가격 전망치를 기존 톤당 9750달러에서 톤당 8698달러로 하향 조정했다. 골드만삭스는 "경기 불황 가능성을 가격에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덴마크 삭소은행의 올레 한센 상품전략책임자는 "유럽과 미국의 경기침체 위험 및 중국의 미약한 경기회복으로 구리의 단기 전망이 악화됐다"며 "현재 200일 이동평균선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거래되고 있는데 추가적인 하락세가 이어질 수도 있다"고 밝혔다. 

현재 200일 이동평균선은 톤당 8370달러선에 위치해있다. 

한센은 "구리가 200일선 부근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다음 지지선인 톤당 7850달러선 부근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일각에서는 장기적으로 구리 가격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은 기관도 있다. 재생 가능 전력, 전기자동차 및 인프라 업그레이드로 인한 수요 급증을 근거로 든 것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중국이 초전도 금속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전력망에 대한 지출을 늘림에 따라 연말까지 구리 가격이 톤당 1만 달러로 오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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