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5일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입장해 자리하고 있다. 이날 헌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재판관 5대4 의견으로 기각했다. 사진=뉴시스
2021년 2월 25일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입장해 자리하고 있다. 이날 헌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재판관 5대4 의견으로 기각했다.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최근 재점화된 학교폭력 논란이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가로막는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지만,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유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반론도 나온다. 

앞서 초·중·고 12년간의 학교폭력 피해를 고백한 표예림(28)씨가 제기한 국회 국민동의청원은 지난 19일 동의 수 5만명을 달성했다. 표씨가 제기한 청원에는 학교폭력 공소시효 및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한 폐지 요구가 담겨있다. 표씨는 “피해 사실을 기반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이들을 말하는 것은 국민의 자율발언권”이라며 “현재의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입을 막으려 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표씨는 이어 “가해자의 명예보다 피해자의 상처와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폐지해달라는 표씨의 주장은 최근 표씨가 과거 학폭 가해자로 지목된 4명 중 2명으로부터 내용증명을 전달받으며 더욱 지지를 얻고 있다. 이들은 표씨에게 자신들의 신상을 공개한 유튜브 영상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보내라며, 요구를 따르지 않을 시 명예훼손과 관련된 법 조항(형법 307조 및 정보통신망법 70조)을 근거로 법적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표씨는 해당 영상은 자신이 올린 것이 아니라며, 특정인에게 피해랄 당했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명예훼손이 되는 조항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사실적시 명예훼손, 공익 목적의 폭로도 처벌 위험?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 논란은 표씨의 학폭 폭로 이전부터 반복돼온 우리 사회의 오랜 논쟁거리 중 하나다. 현행법 상 공익적 목적이 아닌 타인을 비방할 목적으로 공공연하게 사실을 적시할 경우 형법 307조 및 정보통신망법 70조 등에 따라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오히려 피해자들이나 이들을 돕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 용도로 악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양육비 지급 의무를 미이행한 부모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웹사이트 ‘배드파더스’를 운영해온 구본창씨는 사실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지난 2020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열린 항소심에서 벌금 100만원의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구씨가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양육비 미지급 문제 해결을 위해서 대가 없이 활동했다며 ‘공익적 목적’을 인정했지만, 2심 재판부는 얼굴과 직장까지 공개하는 것이 공익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며 사적 제재로 개인의 사생활 및 인격권이 침해될 위험을 강조했다.

구씨는 2심 선고를 앞둔 지난 2021년 12월 16일 열린 사실적시 명예훼손 관련 토론회에 참석해 “3년 동안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28번 고소당해서 계속 경찰조사를 받았다”며 “본인이 어떤 이익도 취한 것이 없이 배고픈 아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자원봉사활동을 한 것 뿐인데,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만큼 지속적으로 시달리게 되면 법이 과연 정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 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된다”고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성폭력 피해자 또한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지난 2002년에는 성폭력 가해자로 법원에서 유죄선고를 받고 직장에서 해임된 대구 소재 대학 교수 2명이 피해자를 도운 대구여성의전화 공동대표 2인을 사이버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해 각 200만원씩의 벌금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 헌재, “인격권 보호 위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필요”

이처럼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따른 부작용이 반복되면서 관련 법 조항이 위헌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헌법재판소는 해당 조항에 대해 합헌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헌재는 지난 2021년 A씨 등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규정한 형법 307조 1항이 위헌이라며 제기한 헌법소원을 재판관 5대4 의견으로 기각했다. A씨는 동물병원의 부당 진료로 반려견이 실명 위기까지 겪게 되자 이를 온라인에 공개하려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을 것을 우려해 대신 해당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재가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합헌으로 판단한 이유는 ‘개인의 인격권 보호’ 필요성 때문이다. 헌재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효과를 고려해 형법 제307조 제1항을 전부위헌으로 결정한다면 외적 명예가 침해되는 것을 방치하게 되고, 진실에 부합하더라도 개인이 숨기고 싶은 병력·성적지향·가정사 등 사생활의 비밀이 침해될 수 있다”며 “타인으로부터 부당한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법률상 허용된 민·형사상 절차에 따르지 아니한 채 사적 제재수단으로 명예훼손을 악용하는 것을 규제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헌재는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되는 입법례와 달리 우리나라의 민사적 구제방법만으로는 형벌과 같은 예방효과를 확보하기 어려우므로 입법목적을 동일하게 달성하면서도 덜 침익적인 수단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대신 개인의 인격권을 보호할 법적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 UN, 두 차례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 권고

해외에서는 일본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형사처벌하는 사례는 드물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2018년 발표한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일부 주에서 명예훼손 관련 규정을 두고 있지만 대부분 민사상 손해배상 문제로 다루고 있으며 영국은 지난 2010년 선동적 명예훼손죄 및 사인 간 명예훼손죄를 아예 폐지했다. 독일의 경우 형법에서 “타인에 대한 관계에서 타인을 비방하거나 세평을 저하시키기에 적합한 사실을 주장하거나 또는 유포한 자는 ‘이러한 사실이 진실한 것으로 증명되지 않으면’에는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제기구 또한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를 권고한 바 있다. 지난 2011년 3월에는 유엔인권위원회(UN Human Rights Committee)가 2015년 11월에는 유엔 산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위원회(ICCPR)에서 우리나라의 사실적시의 명예훼손죄 규정을 폐지 권고했다.

국회에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실제 박주민·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2021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발의헀다.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 또한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지속될 경우 양육비 지급을 촉구하는 행위,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미투, 노동자가 임금 체불이나 직장 갑질 피해를 호소하는 행위 등 사회적 약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제약할 우려가 있다”며 지난해 12월 정보통신망법·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다만 해당 개정안들은 모두 소관위에 계류된 상태로 입법 논의가 지연된 상태다. 학폭 논란으로 인해 재점화된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 논란으로 인해 국회의 입법논의에 속도가 붙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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