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전 언론인.
임순만 전 언론인.

[이코리아] 3·16 한일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생중계된 23분간의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한일관계 정상화는 우리 국민에게 새로운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우리 국민과 기업들에게 커다란 혜택으로 보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일본은 이미 수십 차례에 걸쳐 우리에게 과거사 문제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표했다”고 받아들였다. 윤 대통령은 “독일과 프랑스도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면서 적으로 맞서다가 전후에 전격적으로 화해하고 이제는 유럽에서 가장 가깝게 협력하는 이웃이 됐다”며 “한일 관계도 이제 과거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윤 대통령은 ‘일본이 수십 차례에 걸쳐 우리에게 과거사 문제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표한 바 있다’는 사례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2010년 간 나오토 담화를 들었다. 그러나 2012년 아베 신조 총리가 재집권한 이후 계속적으로 이뤄진 역사 왜곡과 과거 부정에 대한 사례는 불문에 부쳤다. 아베 재집권 이후 일본 각료들은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수차례 자행했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군함도와 더불어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독도 영유권 주장도 여전하다.

화해는 인류의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화해를 이룰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격이 다르다. 그러나 과거사가 얽혀있는 국가 간 화해를 이루고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양측의 자세가 좀 더 선명하게 정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어물쩍한 화해는 훗날 더 큰 갈등을 낳게 될 것이다. 총리가 불분명한 외교적 언사로 ‘유감’을 표명했는데, 내각에서 분명한 표현으로 “사과가 필요하지 않다” “조선을 침략한 사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사과로 볼 수 있는가. 독일이 그런 식으로 사과하고 배상했다는 말인가. 윤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서는 통 크게 화해하면서도 우리의 전 정권과 야당에 대해서는 강하게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일제강점기 일본기업의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를 배상하는 문제와 관련한 정부의 발표에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인권위는 “정부 방안이 유엔총회가 2005년 채택한 ‘국제인권법 가이드라인’에 크게 미흡하다”며 “한국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가 책임 있는 일본기업과 일본 정부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과 사과를 받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번 한일정상회담이 ‘대일 굴종외교’라며 대통령 퇴진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정부는 포괄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본과 한국은 교류와 반목의 역사가 깊은 만큼 얽힌 것들이 많다. 무턱대고 화해로 갈 수는 없다. 미국에 의해 1854년 개항한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했고, 본격적으로 한국을 점령하기 위한 정한론을 펼쳤다. 무력의 중요성을 깨달은 일본은 인재들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며 유럽을 배웠다.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제1대 조선통감을 지내다 안중근 총에 맞아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가 영국 유니버시티칼리리런던에서 화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일본은 운요호(雲揚號) 사건을 통해 가장 먼저 조선에 무력을 사용했다. 무력을 배워 온 일본이 가장 먼저 조선에 써먹은 것이다. 이완용 등이 있어 수월하게 을사늑약을 맺고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 갔다. 

일본의 야심은 본격적으로 노골화되었다. 조선을 합병한 후 만주를 먹고 난징(南京)대학살로 한 달 사이에 30만 명의 중국인을 도살하고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었다. 중일전쟁이 미처 끝나지도 않은 시기에 일본은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작은 나라 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펼칠 수 있었던 힘은 조선의 모든 것을 훑어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1910년대 동양척식회사를 앞세운 까탈스러운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의 땅을 40% 정도 빼앗아 갔고, 조선의 쌀을 항아리 밑바닥까지 털어가면서 강제동원과 강제징용 등 우리민족을 말살시킬 정도로 수탈해 갔다. 당시 쌀조차 모자랐던 일본이 자체의 힘만으로 중국 및 미국을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일본은 ‘청구권’이란 개념을 인정하지 않고 ‘독립축하금’이라는 명목으로 3억원을 한국에 지원했다(이승만 대통령은 일본과의 협상 당시 청구권 자금 130억 달러를 요구했고, 북한의 김일성은 300억 달러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일협정 당시부터 지금까지 일본의 공식입장은 한국 침략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외교의 중심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국무위원장의 판문점회담에서 시작해 6월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9월 19일 남북한 평양공동선언까지 어어졌던 한반도 평화는 다음 해 2월 2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하노이 말바꾸기로 너무 짧게 끝났다.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공동합의문의 내용은 ①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②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 ③ 한반도의 비핵화 ④ 6.25전쟁 중 북한지역에서 전사한 미군유해 발굴 송환 등이다. 미국은 북한이 요구한 단계적 이행이 합리적이라고 보고 북한과 합의했다. 그 다음 해 하노이 회담까지 돌발변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은 싱가포르 합의를 깼다. 3대 3으로 진행된 하노이 회담에서 미국 측은 느닷없이 ‘선 비핵화 후 보상’이라는 카드를 내밀었고, 결국 북미회담은 그것으로 결렬이었다.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신간 <통찰>(푸른숲)에서 하노이 회담이 노딜로 끝난 이유로 위의 ①②③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에 대해 미국의 군산복합체 카르텔이 반대했다는 것과 2018년 11월 20일 결성된 ‘한미워킹그룹’이 남북간 의약품 수송까지도 시비를 걸 정도로 남북화해에 대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정 전 장관은 “현 정부건 전 정부건 외교에서 자국 중심성이 필요하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 지금 우리 관료 중에는 ‘미국의 관리냐 한국의 관리냐’하는 질문을 해야 할 정도로 미국 중심의 사고와 문화에 젖어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를 좋게 보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정부뿐 아니라 언론계에도 학계에도 정계에도 많다. 너무 많다. 대단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3.16 한일 정상회담 이후 두 나라의 관계와 세계정세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예상하기 쉽지 않지만, 한미일 vs 북중러의 신냉전 체체가 가속화되리라는 것은 대체로 동의하는 분석이다. 이 경우 한국이 일본 밑으로 들어가게 되면 최악의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한미동맹은 미일동맹을 능가할 수 없다. 한일간의 문제에 있어서 미국은 먼저 일본을 챙겨왔다.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미국은 일본을 챙겼고, 일본은 한국의 주장을 무력화하는 데 미국의 힘을 빌려왔다. 한국이 한미일 관계에서 일본과 대등한 관계로 올라서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한국은 한미일 vs 북중러 관계에서 최하위의 위상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1950년대 중·소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북한은 러시아·중국과 중거리 외교를 한 경험이 있다. 한국은 그런 경험이 없다.

1994년 핵을 내놓은 우크라이나가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당하고 있는지를 본 북한은 앞으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국제 제재로도 북한 체제는 무너지지 않고 있다. 북한이 핵을 갖게 되면 미국과의 협상에서 더 당당하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한국으로선 점점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도 미국·일본과 대등한 관계로 올라서야 한다. 일본이 강제동원과 강제징용을 전혀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자세로는 한미일 3국의 대등한 위상으로 올라서기 쉽지 않다. 한반도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원대한 구상을 해야 하고, 우리 국력에 맞는 자주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임순만 작가 · 전 국민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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