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리아] 스위스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의 몰락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위축된 가운데, 국내 금융권에 미칠 여파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22조원 규모의 채권이 휴지조각으로 변하면서, 국내 자금시장의 조달 비용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CNBC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스위스금융감독청(FINMA)은 지난 19일(현지시간) UBS의 CS 인수 과정에서 약 160억 스위스프랑(약 22조4700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AT1)을 모두 상각 처리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CS가 발행한 AT1의 가치가 ‘제로’(0)가 되면서, 큰 손실을 보게 된 투자자들은 스위스 금융당국의 결정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무엇보다 CS의 주식은 일정 가치를 인정받은 반면 채권인 AT1은 휴지조각이 되면서 스위스 금융당국이 시장의 상식을 거슬렀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실제 CS 주주들은 이번 UBS의 CS 인수 과정에서 CS 22.48주당 UBS 1주를 받게 됐다. 통상 기업이 부도가 난 경우 채권이 주식보다 상환 순위에서 앞서 있음에도, 주식 가치는 보전되지만 채권 가치는 소멸되는 결과가 나온 셈이다. 

‘코코본드’(조건부자본증권)라고도 불리는 AT1은 금융사의 자본비율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등 건전성에 문제가 발생하면 채권 보유자의 동의 없이 원금이 상각되거나 주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은행들의 주요한 자본조달 수단으로 활용돼왔지만, 은행의 경영이 악화하면 자칫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는 고위험 채권으로 분류된다.

문제는 아무리 AT1이 일반 채권보다 후순위라 하더라도 주식보다는 선순위가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UBS의 CS 인수 과정에서 채권>주식이라는 금융시장의 질서가 무너진 만큼, 향후 채권시장의 투자심리가 크게 위축될 수 있다는 것. 실제 유럽중앙은행(ECB) 등은 20일 성명을 내고 “주식이 가장 먼저 기업의 손실을 흡수하며, 그 후 AT1을 상각해야 한다”며 “이 같은 접근방식은 과거 사례에도 일관되게 적용돼왔으며, 향후 당국의 위기 개입 시에도 계속 적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스위스 금융당국의 CS 발행 AT1을 상각하기로 한 결정이 금융시장의 질서에 꼭 어긋난 것은 아니라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 한국신용평가는 21일 보고서에서 “정리절차가 채권자의 우선순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겠고, 이는 FSB(금융안정위훤회)가 핵심원칙에서도 제시하고 있다”면서도 “모든 정리과정에서 반드시 주식 소각 이후에 AT1 상각이 이루진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CS가 발행한 AT1의 상각 조건은 ▲그룹의 연결 보통주자본비율(CET1)이 7% 이하로 하락한 경우 ▲스위스 금융당국 (FINMA)이 상각이 필요하다고 결정한 경우 ▲CS그룹이 파산하거나 기타 유사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공공 부문 자본 지원을 필요로 하는 경우 등이다.

CS가 발행한 AT1는의 상각 요건인 ‘CET1 7% 하회’는 국내 AT1의 일반적인 상각 시점인 ‘부실금융기관 지정’이 이뤄지는 시기보다 훨씬 앞선다. 은행의 핵심 영업활동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상황에서 미리 상각시켜 자본을 확충하기 위한 것으로, CS의 AT1은 국내보다 발동 확률도, 자본성도 높은 편이다. 스위스 금융당국의 상각 결정은 애초에 AT1 발행 당시 설계된 기능을 작동시킨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 

다만 이번 사태로 채권시장의 투자심리가 위축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영주 하나증권 연구원은 “AT1의 도입과 발행 취지를 감안한다면 이번 사태가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라면서도 “하지만 관례상 채권 투자자에 대한 보호가 주주들보다 우선되어 왔는데 이번에는 주주 가치를 일부 보전했음에도 채권 가치를 우선 소멸시키고 있어 채권 투자자들에겐 커다란 충격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이번 AT1 상각 사태는 고요했던 AT1 시장을 파국으로 몰아넣고 있다. 가장 직접적인 타격은 당연히 유럽 AT1 시장에서 나타날 것이지만 전세계 AT1 시장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며 “WSJ에 따르면 글로벌 AT1 규모는 2750억달러에 육박한다. 이 규모의 채권이 위협받는다면 AT1의 대량 투매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연구원은 이어 ▲고위험군 회사에 대한 투자 위축 ▲중소형 은행에 대한 뱅크런 우려 ▲벤처캐피털(VC) 투자 위축에 따른 자금시장 경색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만 국내 발행 AT1에서 CS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신평은 “AT1 상각은 주식 소각 요건을 충족하기 이전 시점에서, 채권의 커버넌트(Covenant) 조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며 “주식 소각을 위해서는 부실금융기관 지정 등이 필요하며, 이러한 경우 AT1 상각도 이루어지게 될 것이므로 국내에서는 이러한 채권자 우선순위의 역전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실리콘밸리은행(SVB)에 이어 CS까지 무너지면서 무너진 은행에 대한 금융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고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를 포함해 각국 중앙은행의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CS 사태가 금융시장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실 리스크를 증폭시키고 있음은 분명히 사태 진정에는 부정적 뉴스”라며 “CS 발 불확실성 등이 남아 있지만 ECB 의 백스탑(Backstop, 유동성 안전장치가) 의지가 시장 안정에 기여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3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파월의장 등 미 연준도 강력한 백스탑 의지를 밝히면서 시장에 안도감을 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이어 “주요 중앙은행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많은 학습효과를 축적했다는 측면에서 파월의장이나 미 연준이 자칫 시장의 불안을 확산시킬 정책적 실수를 재차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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