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전 언론인.
임순만 전 언론인.

[이코리아] 고르바초프가 타계했다는 소식에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한 시대의 꿈이 사라졌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체제를 무너뜨린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추진했고,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이듬해 동서독 통일을 사실상 용인해 냉전체제를 해체하게 이끈 주인공. 그의 죽음은 갈 길이 먼 우리에게 화해시대의 종언(終焉)으로 스며든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정신을 제시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이 있다. 세계 2차대전 후 전개된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 냉전의 찬 바람이 부는 시대에 고르바초프는 화해의 바람을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지구촌에 섰다. 지구촌이 그런 분위기로 전환할 때 세계 각국은 저마다 주어진 과제가 있다. 그 과제를 하지 못하면 그 나라는 부지하세월 눈물 젖은 빵을 먹기 마련이다. 지금 고르바초프와 탈냉전의 시절이 가고 다시 돌아온 것은 세계 3차대전을 걱정하게 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한반도의 초긴장 상태와 같이 신냉전의 싸늘한 기운이다. 

한반도의 가장 위대한 꿈은 남북한이 통일을 이뤄 세계열강 속에서 한국인의 향기를 내뿜으며 당당하게 사는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통일한 이후 고려와 조선이 통일왕조 천년의 시대를 살아온 터전 위에서 분단을 극복한 한민족으로, 지구촌의 신뢰와 협력을 자랑하는 나라의 국민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한반도의 꿈을 상실한 지점에 서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 시절에 냉전 해체와 분단극복을 이뤄냈다면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이룩하지 못했다. ‘시대의 외톨이’ ‘역사의 지진아’로서 괴로워해야 마땅하다. 우리가 그 꿈에 가장 가까이 도달했던 시기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던 2018년 4월 27일에서 2019년 2월 19일 베트남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던 10개월 남짓한 기간이다. 이 기간은 우리에게 한반도의 가능성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시간이었다고 기록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고 가야 할 무게와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덕담을 건넨 남한 대통령의 평양방문은 그 하이라이트였다. 국민들은 경의선·경원선·동해선이 이어져 한반도종단철도가 완성되고, 한반도종단철도가 중국횡단철도 및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돼 김포공항이나 인천공항을 국토의 끝으로 인식했던 국민들이 기차를 타고 곧바로 유럽으로 가는 광대무변의 꿈을 보았다. 이 꿈은 ‘깨몽’처럼 끝났지만 우리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한 희망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인식했다. 그런 인식은 아주 완벽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에게 자산으로 살아 움직이게 될 것이다. 

지금 남북한은 상대방이 받아낼 수 없는 기묘한 공격 드라이브를 서로 구가하는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이 핵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그 단계에 맞춰 북한의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이른바 ‘담대한 구상’을 제안했다. 북한에 대한 대규모 식량공급, 발전과 송배전 인프라 지원, 국제교역을 위한 항만과 공항의 현대화, 북한 농업생산성 제고를 위한 기술지원, 병원과 의료인프라의 현대화, 국제투자 및 금융지원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김여정 북한노동당 부부장은 8월19일 조선중앙통신에 발표한 담화문에서 “앞으로 무슨 요란한 구상을 해가지고 문을 두드리겠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절대로 상대해주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남조선 당국의 ‘대북정책’을 평하기에 앞서 우리는 윤석열 그 인간 자체가 싫다”고 날선 반응을 보였다. 윤 대통령의 제안이 담대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을 전제하지 않는 외교적 현명함과 동료살해 북한어부 북송사건을 정치화하지 않는 사려 깊음을 우선해야 했을 것이다. 북한 동료 16명을 살해하고 남한으로 온 어부를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받아들여 우리 내부에서 풀어간다는 것이 가능한 현실인가. 김 부부장의 ‘허망한 꿈을 꾸지 말라’는 담화는 “황당무계한 말을 줄줄 읽어댄” 따위의 맹렬한 공격으로 일관하고 있어 북한 정권이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치찬란한 형편이라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김 부부장의 발언에서 보듯 북한은 한반도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형편에 있지 않다. 문제는 윤 대통령의 구상인데, 윤 대통령은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시절의 남북교류협력 제로 시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다리를 놓는 대통령이 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다. 사실 남북문제는 레토릭을 제외한다면 역대 정부에서 시도한 정책을 뒤엎고는 시작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지 않다. 과거 정부의 포용정책을 자산으로 삼을 것인가, 물러서지 않겠다는 원칙 있는 대립을 선택할 것인가를 주도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윤 대통령은 지지율 하락도 큰 문제다. 30%를 오가는 낮은 국내 지지율도 문제지만 세계 22개 주요국 지도자 지지율조사(미국 여론조사업체 모닝컨설트)에서 8월 내내 꼴찌를 달리고 있는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다. 윤 대통령은 주요국 지도자 지지율 조사에서 지난 8월 30일 현재 지지율 20%, 비지지율 72%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률이 ‘지지한다’는 응답률보다 52%포인트나 높다. 이런 상태로는 어떤 정책도 주목을 받기 어렵다.

“기본부터 배우라”고 쏟아내는 외신들의 비아냥 섞인 지적도 아프다. 지난달 25일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많은 사람들은 윤대통령이 정책을 제시하는 고압적인 방식에 대해 혐오한다”며 “그는 지지받는 정책조차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기본적인 정치 트릭조차 아직 배우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국제여론에서 정치의 기본적인 부분에서부터 비난에 가까운 이런 소리를 듣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고압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면 탄력 있는 정치는 펼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한강의 기적’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등 지구촌 경탄의 대상이었던 한국의 국격이 윤석열 정부 들어 급격하게 구겨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한반도의 꿈은 일차적으로 집권 세력이 가꿔가야 한다. 그 꿈의 높이가 국민의 높이가 된다. 집권자는 국민을 높여야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국민의 존중을 받아야 국제무대에서도 인정을 받는다. 열강들의 세력 재편으로 한반도 주변이 다시 요동치는 상황에서 한국의 집권 세력이 여당 내부의 충돌과 과거 정권과의 갈등으로 날을 보내는 것 같아 우려스럽기 짝이 없다. 

임순만 작가 · 전 국민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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