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윤석열 대통령이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언급하자 비판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역사문제 해결 의지보다 외교관계 개선을 강조한 발언에 대해 광복절에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지난 15일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과거 우리의 자유를 되찾고 지키기 위해 정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대상이었던 일본은 이제, 세계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도전에 맞서 함께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하는 이웃”이라며 “한일관계가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양국의 미래와 시대적 사명을 향해 나아갈 때 과거사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 “한일관계의 포괄적 미래상을 제시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계승하여 한일관계를 빠르게 회복하고 발전시키겠다”며 “양국 정부와 국민이 서로 존중하면서 경제, 안보, 사회, 문화에 걸친 폭넓은 협력을 통해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함께 기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야권은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1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77주년 광복절에 식민지배의 역사를 ‘정치적 지배의 역사’라고 순화한 만큼, 대통령의 메시지는 국민이 아닌 일본만을 향해 있었다”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간의 현안은 외면한 채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라는 모호한 수사만 남발했다”고 지적했다.

시민사회단체도 윤 대통령의 경축사를 비판하고 나섰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15일 논평을 내고 “현재 한일 간에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가 가장 큰 현안이 되고 있지만 윤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자유’만 33회 외쳤을 뿐”이라며 “광복 77년을 맞도록 사죄 한마디 듣지 못한 일제 피해자 문제는 단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또한 “어떻게 광복절에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얘기만 하고, 해결되지 않은 역사 문제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말씀은 한마디도 없으시냐”며 “우리(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는 아직도 해방이 오지 않았다”라고 실망감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의 발언이 비판받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에 굳이 한일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언급했기 때문은 아니다. 전임 대통령들도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일관계 회복을 강조한 경우는 많았다. 문제는 한일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과거사 해결을 강조했는지다. <이코리아>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들의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일관계와 과거사 문제가 어떻게 표현됐는지 짚어봤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8월 15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제74회 광복절 경축식에서 참석하여 경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8월 15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제74회 광복절 경축식에서 참석하여 경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문재인, 수출규제 이후 대일 발언 수위↑

전임 대통령들은 대부분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일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과거사 문제 해결의 필요성도 함께 언급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중 다섯 번(72~76주년 광복절)의 광복절 경축사에서 모두 한일관계에 대해 언급했는데, 특히 임기 첫 경축사에서는 “한일관계의 걸림돌은 과거사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문제를 대하는 일본 정부의 인식의 부침에 있다”라며 과거사 문제 해결의 책임은 한국이 아닌 일본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 

2018년에는 “아베 총리와도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나가고,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번영을 위해 긴밀하게 협력하기로 했다”며 상대적으로 온건한 목소리를 냈지만, 일본의 수출규제가 시작된 2019년부터는 발언의 수위가 매우 높아졌다. 실제 문 전 대통령은 2019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을 13번이나 언급했는데 과거사 문제는 물론 수출규제에 대해서도 “국제 분업체계 속에서 어느 나라든 자국이 우위에 있는 부문을 무기화한다면 평화로운 자유무역 질서가 깨질 수밖에 없다. 먼저 성장한 나라가 뒤따라 성장하는 나라의 사다리를 걷어차서는 안 된다”고 질타했다.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일본제철(전 신일철주금)에 국내 자산 압류명령이 공시송달된 2020년에는 “정부는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며, 피해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원만한 해결 방안을 일본 정부와 협의해왔고, 지금도 협의의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면서도 “우리는 한 개인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 결코 나라에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것”이라며 단호한 입장을 내비쳤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8월 15일 오전 서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0주년 광복절 중앙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8월 15일 오전 서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0주년 광복절 중앙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박근혜, 위안부 협상 전 과거사 문제 반복 언급

광복절 경축사에서 과거사 문제를 언급한 것은 보수성향 대통령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위안부 협상 문제로 비판을 받아온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 임기 중 네 번 광복절을 맞았는데, 이 가운데 위안부 협상(2015년 12월 28일) 이전 세 번(68~70주년)의 광복절 경축사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임기 첫 광복절인 2013년에는 “일본은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함께 열어갈 중요한 이웃”이라면서도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최근 상황이 한일 양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양국 국민 모두의 바람처럼 진정한 협력동반자로 발전될 수 있도록 일본의 정치인들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용기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한다”며 “과거 역사에서 비롯된 고통과 상처를 지금도 안고 살아가고 계신 분에 대해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일본의) 책임있고 성의있는 조치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일관계 회복의 열쇠는 일본 정부의 과거사 문제 대응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위안부 협상 이전인 2014~2015년 광복절 경축사도 마찬가지다. 2014년에는 “정치는 국민의 마음을 읽고 올바른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데 일본의 일부 정치인들은 오히려 양 국민의 마음을 갈라놓고 상처 주는 일을 하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고, 2015년에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에 대해 “우리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사죄와 반성을 근간으로 한 역대 내각의 입장이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국제사회에 분명하게 밝힌 점을 주목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다만 박 전대통령은 위안부 협상이 마무리된 이후인 2016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한일관계나 일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8월 15일 오전 광화문에서 열린 제65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8월 15일 오전 광화문에서 열린 제65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 이명박, 독도 방문 후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

이명박 전 대통령도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일관계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이 전 대통령은 임기 중 맞이한 다섯 번의 광복절 가운데 2009년을 제외한 네 번의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일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전 대통령은 임기 첫 광복절인 2008년에는 “일본도 역사를 직시해서 불행했던 과거를 현재의 일로 되살리는 우를 결코 범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짧게 언급했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의 뜻을 밝힌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의 담화가 나온 2010년에는 이를 “일본의 진일보한 노력”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풀어야 할 과제가 아직도 남아 있다... 역사를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도 함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야말로 한국과 일본이 가야 할 바른길”이라고 강조했다. 

이 전 대통령은 독도 방문으로 한일관계가 경색된 2012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임기 중 가장 강경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 전 대통령은 “우리는 일본과의 과거사에 얽힌 사슬이 한일 양국뿐 아니라, 동북아의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지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며 “특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양국 차원을 넘어 전시 여성 인권 문제로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올바른 역사에 반하는 행위이다. 일본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 진보성향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진보성향 대통령으로 분류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한일관계에 대한 언급 빈도가 낮지만,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6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만 일본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당시 진행 중이던 일본 헌법개정 논의에 대해 상당한 우려를 드러냈다. 노 전 대통령은 “일본은 헌법을 개정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과거에 대하여 진심으로 반성하고, 여러 차례의 사과를 뒷받침하는 실천으로 다시는 과거와 같은 일을 반복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하게 증명해야 할 것”이라며 “독도, 역사교과서, 야스쿠니 신사참배,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가 그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섯 번의 광복절 중 2000~2001년 두 차례 한일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동북아 안보에서 주한미군이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미국, 일본과의 긴밀한 공조관계도 흔들림 없이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짧게 언급했다. 

하지만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논란이 발생한 2001년에는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우려를 나타냈다. 김 전 대통령은 2001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역사문제는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요, 미래의 문제”라며 “우리 민족에게 끼친 수많은 가해 사실을 잊거나 무시하려는 사람들과 어떻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으며, 미래를 안심하고 같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 국민들이 갖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거의 일본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1995년 광복절 경축식에서는 “일본이 과거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 ‘식민지배’ vs ‘정치적 지배’ 전임 대통령 어땠나?

윤 대통령이 식민지배의 역사를 ‘정치적 지배의 역사’라고 순화해서 표현했다는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비판은 사실에 근거한 것일까? 문민정부 출범 이후 전임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전임 대통령들은 ‘식민지배’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했으며 ‘정치적 지배’라는 용어를 사용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실제 문·박 두 전임 대통령은 ‘식민지배’, ‘일본 제국주의 지배’ 등의 표현을 사용했으며, 이 전 대통령은 ‘지배’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당시를 표현할 때 ‘식민지배’, ‘식민지 수탈’ 등의 표현을 썼다. 

가장 강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매번 광복절을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해방된 날”,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날”이라고 표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2002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35년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동안에도 끝까지 저항하며 나라의 명맥과 법통을 이어 왔다”고 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식민지배’보다는 ‘식민통치’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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