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리아] 교육에 있어서 가정은 중대한 역할을 한다. 먼저 현실만을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품에 안긴다. 원튼 원치 않든, 교육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의외로 신생아 때부터 아이는 부모의 사소한 행동과 어투 하나하나까지 감지한다. 그렇기에 부모를 통해 주어지는 모든 일상이 아이에게는 수업이다. 그의 인지가 발달하고 그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후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부모가 특별하게 교육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조차도 자녀에게는 메시지가 되고 (부정적인 의미의) 교육이 될 수 있다.

순전히 논리적으로만 보아도 인간 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모든 인간은 어미의 배에서 태어나고, 그 어미의 배에 씨를 넣어 준 아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아이를 놓고 그를 어떠한 방식으로 교육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한 역시 그의 부모와 가정에게 있다. 책임과 권한은 같이 간다.

결론적으로 자녀 교육의 주체는 부모와 가정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이토록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이유는 현대 교육이 이 당연한 원리를 잊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부모와 가정을 대신해 더 많은 교육을 감당할수록 보다 이상적인 교육이 된다 생각한다면 그것은 중대한 오판이다. 거창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전성은 선생은 그의 책 ‘왜 학교는 불행한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학교는 그 출발이 국가를 위해 전쟁에 필요한 전사 양성이 목적이었고, 그 다음이 세금을 걷기 위해 글을 쓸 줄 아는 관리의 양성과 왕실을 지탱해 줄 종교에 필요한 사제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모두 국비로 설립되고 운영되는 국립이었다.”

“학교는 필요와 목적, 운영에 있어 그 출발부터 철저하게 통치 집단에 의한, 통치 집단을 위한, 통치 집단의 기관이었을 뿐 아이들을 위한 기관이 아니었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넘어서 사실이 그러하다.”

모든 기관은 태생적인 한계를 갖는데 학교도 마찬가지다. 풀어 말하자면, 공교육은 늘 공적인 목적이 우선이다. 각 학생의 발전을 우선하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를 갖는다. 그것이 무조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국가가 세운 기관이 국가를 위하는 일은 당연하며 국가의 녹을 받는 교사들이 국가에 충성하는 일은 이상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학교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해줄 것이라는 환상에서 우리 스스로 벗어나는 일이다. 학교가 아이들을 위해 세워진 기관은 아니라는 사실을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한다.

각 부모는 자기 자녀 교육을 주도해야 하며, 일정 부분 스스로 해낼 수도 있어야 한다. 가정 자체가 그 어떤 기관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교육의 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페스탈로치 선생은 ‘은자의 황혼’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버이가 주관하는 가정, 이것이 모든 인간의 순수한 자연 교육의 터전이다.”

한 아이의 교육에 있어 공교육은 부분적으로만 개입해야 하며, 각 가정은 각자 필요한 만큼 교육 기관들을 활용하되 전적으로 의지하지는 말아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이 국가 교육에 지나치게 의존할 때, 전체주의적 세력이 그것을 악의적으로 활용할 여지가 생긴다. 독일의 나치가 그렇게 했고, 멀리 갈 필요 없이 오늘날 우리의 북녘 땅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의 많은 부분이 민주화되었지만, 교육 영역에 있어서는 여전히 국가에서 내려 준 교육을 답습하는 일이 빈번하다. 교육만큼은 민주적으로 자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민주 사회에서도 말이다. 국정 교과서 편찬과 같이 눈에 뻔히 보이는 시도는 차치하더라도, 보수건 진보건 교육의 헤게모니를 잡아서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에게 자신들의 사상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려는 시도는 항상 있어 왔다. 자기가 옳다 생각하여 그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자기 욕심일 뿐이다. 스스로를 진정한 스승으로 여기는 이라면 학생들을 한낱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페스탈로치는 이런 말도 했다.

“인간에게 직업 교육과 계층 교육을 시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가정적인 복을 누리게 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학교 교육의 태생적 리스크를 줄이고, 학교가 건강한 교육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학교는 각 가정을 대신하는 역할이 아닌 가정을 돕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부모들도 교사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짐을 지우지 말고, 스스로 교육의 책임을 감당하도록 하자.

최근 교육부에서 취학 연령을 낮추는 정책을 제안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는 일이 있었다. 학교와 유치원의 교사들은 나름의 이유를 들어 반대를 했겠지만, 나는 그 정책의 방향성이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국가가 가정의 교육적 역할을 대신하려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안락한 부모의 품에서 떼어내 좀 더 일찍 딱딱한 의자에 앉힌다고 해서 좋은 교육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 가정은 너무나 중요하다. 국가가 모든 교육을 다 감당하게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자녀들이 평안하게 가정에 거하면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지를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

[필자 소개] 이송용 순리공동체홈스쿨 교장, 전 몽골국제대학교  IT 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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