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전 언론인.
임순만 전 언론인.

[이코리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을 꼽으라면 단연 일본으로부터의 광복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8월15일 일황 히로히토의 항복선언이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나온 직후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쏟아져나온 서울 세종로 모습은 우리나라 역사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운집한 기록이다.

중앙청을 배경으로 렌즈가 최대한으로 포착할 수 있는 세종로와 서울시청과 남대문을 이르는 넓은 공간에 남녀노소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감격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나라를 위해 이렇게 감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대의를 좇아 모든 국민이 함께 할 수 있는 뛰어난 자질이 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도 주요 고비마다 이어진 1987년 서울시청 앞 광장의 6월항쟁, 모르는 사람들이 흔쾌히 어깨동무를 하고 ‘대~한민국’을 외쳤던 2002년 서울월드컵 거리응원, 2016년 11월 광화문광장의 촛불행진 등 선량한 국민들의 힘은 이 나라를 깨어나게 했고, 그 힘으로 우리는 또 다른 내일을 만들어왔다.

광복 77주년을 맞은 올해는 세계 경제의 어려움과 신냉전체제에서의 분단국의 딜레마, 그리고 국내 정치지도력의 신뢰 상실 등으로 이런 열기가 상당히 가라앉아있다. 이럴 때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커다란 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감옥에서 세상에 아홉번을 나가더라도 왜놈에게 순종하지 않겠다는)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 동지들에게 알렸다. 백정·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 국민이 되겠다는 바람을 가지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구(1876~1949)의 호는 ‘백범’이다. 본명이 창수였던 그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쓴 『백범일지』에 자신이 지은 새 이름과 호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하는데, 백정과 범부를 생각하며 호를 지었다는 말에 역시 김구 선생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는 1919년 3.1만세운동을 하고 나서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해주에서 상해로 가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그는 안창호 동지에게 정부의 문지기를 시켜줄 것을 부탁했다. 문지기가 되기를 소원했던 데에는 내력이 있다. 그가 안명근(안중근 사촌동생) 독립운동자금 모집사건 관련자로 체포돼 17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대문감옥에 갇혔을 때의 일이다.

신문실에 끌려가 일본인 간수로부터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끌려왔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김구는 “잡아왔으니 끌려왔을 뿐이고, 이유는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간수는 다시는 묻지도 않고 손발을 묶어 천장에 매달았다. 추운 겨울밤 전신에 냉수를 끼얹고 구타를 계속했다. 기절을 했다가 정신이 들면 간수는 안명근과의 관계를 물었다. 안명근과는 알고 지내던 사이일 뿐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간수는 김구를 천장에 매달고 몽둥이로 내리쳤다. 그들은 밤을 새워 심문을 하고 구타를 했다,

“나는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평소에 무슨 사무든지 성심껏 보아왔다고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국가를 구하고자 했던 내가 저 왜구들처럼 밤을 새워가며 사무를 보았던 적이 언제 있었던가 자문하니, 전신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러웠고, 스스로 ‘네가 과연 망국의 근성이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의 눈물이 눈에 찼다.”

김구 선생이 서대문 형무소 시절에 꾼 꿈이 내 나라 정부의 문을 지키고 유리창을 닦아보는 것이었다. 그가 안창호에게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이미 김구는 국내에서 지조 높기로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다) 안창호는 “우리도 백범 같은 이가 정부 청사를 지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국무회의에 제출하여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경무국장 사령서를 교부했다. 문지기의 꿈을 안고 임시정부를 찾아간 김구는 이렇게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에는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에는 임시정부 최고수반인 국무령이 되었다. 1940년 3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한다.

백범일지를 읽다 보면 우리 국민으로부터 ‘가장 존경하는 애국자’ 1위에 오르는 김구 선생의 참 모습을 느낄 수 있다. 글 서두에서 자신이 ‘상놈’의 자손임을 밝히고 있거니와, 그는 별다른 신학문을 공부하지 못했고 서당을 좀 다닌 것이 전부다. 그는 나이 열일곱에 과거시험인 ‘임진경과’에 응시했다가 자신의 실력으로는 가당치도 않거니와, 매관매직 때문에 자신의 신분으로는 과거를 쳐다볼 수조차 없다는 걸 깨닫고 낙담하여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주위의 어른들이 “관상이라도 봐서 먹고 살아가라”는 충고를 해줬다. 그래서 관상을 조금 공부하다 보니 자신의 관상이 너무 나쁘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그는 “관상이 나쁘면 마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되자”고 생각해 마음을 갈고 닦으며 청년기를 보냈다.

『백범일지』는 소설 이상의 이야기 솜씨를 담고 있어 흥미진진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 많아 우리 민족의 필독서라 할 만하다. 책 내용은 해방 직전에서 끝나지만, 일제가 패망해 임정요원들이 중국에서 돌아온 후 남과 북이 서로 단독정부 수립에 나섰을 때 선생이 북한연석회의에 참석(1948년 4월)했던 사실을 여기 특기할 만하다. 많은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을 방문한 선생은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연설에서 이렇게 포효했다.

“본인은 일찌기 글을 배우지 못해 무식하고 따라서 말도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몇마디 글자를 적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배우지 못했다는 것 조차도 선생에게는 당당한 영광이 된다. 그는 남북한 각각의 단독선거는 통일을 막고 동족상잔을 불러올 것이라고 준엄하게 경고했다. 그의 경고는 시대의 예언이 되었다. 분단을 목전에 된 남과 북에 메아리친 가장 아름다운 연설이요, 고난의 시대에 빛난 순금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최근 출간된 작가 김훈의 장편소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그리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더없이 혼란스럽던 시기를 명징한 양심으로 살았던 젊은이의 모습이 간장감 있게 살아난다. 소설은 이토 히로부미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의 물결과 안중근으로 상징되는 청년기의 순수한 열정, 살인이라는 중죄에 임하는 한 인간의 윤리와 야만을 뚫고 나가야 했던 시대적 대의가 찬연하게 대비된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안중근이 좇는 대의와 그가 느끼는 인간적인 두려움이 부딪친다.

소설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순간과 며칠간의 일들을 재구성한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 자신과 타인의 희생을 불사하면서도, 집안의 장남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며 천주교에서 세례받은 신앙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수시로 머뭇거리지만 결단의 순간에는 추호도 흔들림 없는 그의 정신세계가 번뜩거린다. 안중근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던 동지 우덕순과 나누는 대화.

—총을 많이 쏘아보았는가?

—많이 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토는 꿩보다 덩치가 크니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 검찰관과 법관들이 거사를 단행한 안중근 일행을 조사하며 남긴 신문조서와 공판 기록 또한 적재적소에 활용돼 소설의 현장감을 높인다.

—이토 공은 고관으로 수행원과 경호원이 많은데, 그대는 암살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가?

—그것은 사람의 결심 하나로 되는 일이다. 결심이 확고하면 아무리 경호가 많아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안중근과 우덕순의 답변에서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짧은 생애를 바친 청년들의 비장미와 동경심, 슬픔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번져 오른다. 그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백범일지』에는 김구가 스무살 무렵 동학(東學) 접주(교구의 우두머리)가 되어 군사들(조선 경군과 왜병)에게 쫓길 때 안중근 가문과 교제한 내력이 나온다.

어느날 해주 청계동 안진산 댁에서 김구에게 피신해 있으라는 연락이 온다. 안중군 부친 6형제가 세력을 뻗치는 대가였다. 6형제 중 둘째 태현의 장남이 안중군이었다. 16세의 중근은 돔방총을 메고 수렵을 다녔는데 백발백중하는 재주가 있어 짐승을 잡아다가 여러 사람이 고기를 먹게 하였다. 안진사의 사랑에 놀러오는 당대 손꼽히는 학자 고능선이 있었다. 고능선은 젊은 김구를 특별히 배려했지만 김구는 높은 학자에게 누를 끼칠까 두렵기만 했다. 젊은이가 어느 날 눈물을 흘리며 말씀을 드렸다.

“저는 불과 스무살에 제 거짓과 잘못으로 많은 실패를 경험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민망합니다. 선생님이 저의 자격과 품성을 밝히 보시고 장래 나아갈 바가 있어 보이거든 사랑도 하여 주시고 교훈도 하여 주시려니와, 만일 좋은 사람이 될 조짐이 없다면 저는 고사하고 선생님의 높은 덕에 누를 끼치게 됨을 원치 아니하나이다.”

젊은이의 마음에 고통이 있는 것을 보고 선생이 극히 동정하는 말로 이르셨다. “자네가 결심하면 나의 눈빛이 미치는 데까지, 내게 있는 한은 자네를 위하여 마음을 다할 터이니 젊은 사람이 너무 상심 말고 나와 같이 노세. 갑갑할 때는 우리 원명(아들)이와 함께 산구경도 다니며 놀게.” 선생은 김구에게 일을 해나가는 데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3단계가 필요하다는 금언을 들려주었다.

해주 안진사의 사랑방에서 김구와 안중근이라는 우리나라 독립운동 1,2위를 차지하는 젊은이들이 배출된 것이다. 빛은 어디서 오는가. 그런 진심을 키우는 곳에서 싹트는 것이 아니겠는가.

임순만 작가 · 전 국민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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