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국민연금공단
사진=국민연금공단

[이코리아] 국민연금공단이 2011년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주범인 기업 옥시의 영국 본사 레킷벤키저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연금의 ESG 평가체계가 미흡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국내 주식과는 달리 해외자산에는 ESG 평가체계가 적용되지 않고 있어 신속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국민연금이 지난 4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보유한 레킷벤키저 지분은 지난 2016년 1545억원 지난해 3539억원으로 129% 증가했다. 4년 만에 보유 지분을 두 배 이상 늘린 셈이다.

국민연금은 “레킷벤키저에 대한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금액은 기금 규모 및 해외주식 투자 규모 증가에 따라 2016년 대비 증가했다”며 “전체 해외주식 투자 규모 대비 비중은 2016년 0.18%에서 2021년 0.14%로 줄어들었다”고 해명했다. 국민연금은 해외 투자 종목군을 구성해 패시브 방식으로 기금을 운용하는 만큼, 해외 투자 규모가 늘어나면서 투자 종목군에 포함된 레킷벤키저 지분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해명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은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설명”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참여연대, 금융정의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지난 8일 공동 성명을 내고 “전체 투자 규모와 옥시 자체에 대한 투자금액이 증가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며 “왜 국민들을 살해한 살인기업에 투자 규모를 늘렸는지를 물었는데, 국민연금은 엉뚱한 해명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만약 국민연금이 비윤리적 기업을 투자 대상에서 배제하는 기준을 세웠다면, 전체 투자 규모가 늘어나더라도 레킷벤키저에 대한 투자 규모는 줄일 수 있다. 

이들은 “국민연금은 지난 2019년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을 수립하고 ESG투자를 늘리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여전히 이를 지키지 않고 있다”며 “수익성만 보고 투자하는 것은 윤리적 투자를 추구하는 세계적 흐름에도 역행하는 것이며, 미국과 노르웨이 등 선진국들의 경우 환경파괴나 국민들의 건강에 문제를 입힌 기업들을 투자대상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국민연금, 해외자산 ESG 평가체계 도입 언제?

물론 국민연금도 자체적인 ESG 평가체계를 구축하고 기금 운용 시 평가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실제 국민연금은 13개 평가항목과 52개 지표에 따라 매년 2회 정기 ESG 평가를 실시해 기업을 AA, A, BB, B, C, D 등 6개 등급으로 나눈다. 이 중 D등급을 받은 기업에 대해서는 벤치마크를 초과해 편입하지 않도록 금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 기준이 아직 국내 주식에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은영 국민연금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지난해 발표한 ‘해외 주요 연기금의 ESG 투자전략 및 시사점’ 보고서에서 “상당 수준 논의가 이루어진 국내 주식 운용과 달리, 채권 및 해외자산에는 어떤 방식으로 ESG 요인을 고려한 투자를 적용할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물론 국민연금도 해외 투자에 활용할 수 있는 ESG 평가체계 구축에 이미 나선 상태다. 실제 국민연금은 지난해 해외증권 책임투자 이행체계에 관한 연구용역을 진행했으며, 올해는 연구용역 결과를 토대로 해외 자산의 특수성을 고려한 세부 이행방안을 마련 중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진척 상황이 나오지 않은 만큼, 언제 해외자산에 대한 ESG 평가체계가 도입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 국민연금, 탈석탄 투자기준 도입 논의도 지연

해외 자산에 대한 ESG 평가체계를 준비 중이라는 국민연금의 해명을 시민단체들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선언한 탈석탄 투자기준 도입 논의도 여전히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 국민연금은 지난해 5월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 ‘국민연금기금 투자제한 전략 도입 방안’ 등을 심의·의결하고, 석탄채굴 및 발전 관련 투자를 제한하는 ‘네거티브 스크리닝’을 도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실제 연구용역은 반년 뒤인 지난해 11월에야 입찰이 진행됐다. 연구용역을 맡은 딜로이트안진이 지난 4월 기금운용위원회에 석탄 관련 매출 비중이 30/50% 이상인 기업에 대한 투자를 배제하는 방안이 담긴 용역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아직 최종적인 투자기준 설정과 관련된 논의는 진전되지 않고 있다. 

탈석탄 논의가 지연되는 동안 국민연금의 석탄 투자 규모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독일 비영리단체 우르게발트 등 25개 NGO가 지난 2월 발표한 ‘세계 석탄 퇴출 리스트’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석탄 투자액은 지난해 기준 약 128억94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14억 달러 늘어났다. 이는 글로벌 연기금 중 일본 공적연금(GPIF), 네덜란드 국부펀드에 이어 3위에 해당하는 규모다. 

지난 6월에는 한국전력 지분을 기존 6.56%에서 10%로 늘리겠다고 공시했다가. 환경단체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여전히 화석연료 의존도가 높은 데다 해외 석탄사업 투자도 지속하고 있는 한전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탈석탄 선언과 모순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당시 기후솔루션·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은 공동 성명을 내고 “재무건전성에 비상등이 켜졌지만, 근본적인 개선책이 부재한 한전 투자금을 늘리려는 시도는 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탈석탄’이라는 뚜렷한 국제 동향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역시 국민연금이 선관주의 의무를 다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국내 자산에 대한 ESG 투자기준이 부실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실제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는 국민연금의 ESG 평가체계에 대한 지적이 다수 제기됐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연금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ESG 평가를 위해 필요한 기업의 정보 중 환경(E)과 관련된 정보의 입수율은 4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절반의 자료만으로 기업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국민연금은 ESG 투자기준을 해외주식 및 채권까지 확대해 내년까지 전체 자산의 절반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해외자산에 대한 ESG 평가체계 도입 논의에 속도를 내고 기존의 비판을 불식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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