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12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낙태죄' 개정과 관련해 이흥락 로고스 변호사 등 전문가들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 2020년 12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낙태죄' 개정과 관련해 이흥락 로고스 변호사 등 전문가들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각)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49년 만에 폐기하면서, 국내에서도 낙태법에 대한 논의가 재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입법 공백이 3년째 이어지면서 여야 모두 조속한 입법이 추진돼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있지만, 각종 쟁점에 따라 의견이 크게 엇갈려 합의점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9년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269조 1항 및 270조 1항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2020년 12월 31일까지 대체입법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실제 헌재 판결 이후 정부 1건, 더불어민주당 2건(권인숙, 박주민), 국민의힘 2건(서정숙, 조해진), 정의당 1건(이은주) 등 및 여야는 총 6개의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여성단체와 보건단체 등 낙태죄 폐지 1년 4.10 공동행동이 지난 4월 10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집회를 열고 유산유도제 즉각 도입, 임신중지 의료행위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재생산 및 성에 관한 건강과 권리 포괄적 보장 등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여성단체와 보건단체 등 낙태죄 폐지 1년 4.10 공동행동이 지난 4월 10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집회를 열고 유산유도제 즉각 도입, 임신중지 의료행위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재생산 및 성에 관한 건강과 권리 포괄적 보장 등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낙태죄, 대체입법 늦어지는 이유는?

낙태죄 대체입법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는 이유는 쟁점별로 각 개정안의 입장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주수 제한’과 관련된 간극은 좁히기 힘들 정도다. 우선 권인숙·박주민·이은주 의원안의 경우 형법상 낙태죄 처벌 규정을 폐지하는 내용인 만큼, 낙태가 허용 기간에 제한이 없다. 

반면 조해진 의원안은 태아의 심장박동이 감지되기 시작하는 임신 6주 이전까지만 낙태를 허용하고,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거나(10주), 강간·준강간에 의한 임신인 경우 또는 임신부의 건강이 위험한 경우(20주)에 대해서만 허용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서정숙 의원안은 임신부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만 낙태 허용 기간의 제한을 없애는 대신, 그 외의 사유에 따른 낙태는 임신 10주까지로 제한했다.

정부안은 14주까지는 임신부 본인의 의사에 따라 낙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했으며, 그 외의 사유에 대해서는 24주까지 낙태 허용 기간을 연장하는 내용이다. 여야 의원들이 발의한 5개 개정안의 절충안인 셈이다.

헌재는 임신 22주 이내를 낙태 허용이 가능한 기간이라고 봤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최선의 의료기술과 의료 인력이 뒷받침될 경우 태아는 임신 22주 내외부터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다고 한다”며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까지의 낙태에 대해서는 국가가 생명보호의 수단 및 정도를 달리 정할 수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의료계 또한 10주 미만까지는 낙태를 전면 허용하는 대신 사회경제적 사유가 인정된 경우는 22주까지 연장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헌재 결정문이나 의료계의 입장을 고려하면, 낙태 사유에 따라 허용 기간을 14주와 24주로 나눈 정부안을 통과시켜도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민의힘 서정숙 의원이 지난 6월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건강한 여성의 삶을 다시 생각하다' 낙태법 개정안 입법 세미나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민의힘 서정숙 의원이 지난 6월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건강한 여성의 삶을 다시 생각하다' 낙태법 개정안 입법 세미나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정부안은 절충안? 여성·종교계 모두 반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안으로 쉽게 합의를 도출하기는 어렵다. 주수 제한에 대한 입장은 곧 태아의 생명이 언제 시작되는 것인지, 낙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뜻하기 때문이다.

종교계 등에서는 헌재나 정부안이 주장하는 낙태 허용 기간이 지나치게 길다며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12주 이내에 95% 낙태가 이뤄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정부안은 사실상 낙태죄를 폐지하고 낙태를 전면 허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 ‘심장박동법’으로 불리는 조해진 의원안은 낙태 허용 기간을 임신 6주 이내로 제한한 만큼, 종교계의 목소리를 가장 잘 반영한 법안으로 꼽힌다. 

여성계 또한 정부안에 대해 다른 이유에서 반대하고 있다. 주수 제한이 남아있는 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조건부로 허용될 뿐 결국 낙태죄는 존치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실제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여성단체 및 기관은 임신중지의 비범죄화를 위해 낙태죄의 전면 폐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가족구성연구소 등도 ‘태아의 독자적 생존 가능 시기’에 대한 규정을 법안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성계는 기존 형법처럼 낙태를 처벌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이를 재생산 건강의 영역으로 보고, 낙태죄를 폐지하는 대신 사회보장제도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6건의 개정안 중에서는 임신부의 자기결정권을 명시한 권인숙·박주민·이은주 의원안이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특히 권인숙 의원안의 경우 재생산 건강권의 개념 및 재생산 건강 증진 사업 추진근거 등이 포함돼있다. 

이처럼 낙태 허용 기간의 문제는 “낙태를 몇 주까지 허용할 것이냐”뿐만 아니라, “주수 제한 규정을 존치할 것이냐”의 문제까지 얽혀 있다. 절충안으로 보이는 정부안이 오히려 여성계와 종교계 양쪽으로부터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여성계에게 정부안은 사실상 낙태죄를 존치해 기존 형법과 다를 것이 없는 법안이며, 종교계에게 정부안은 95% 이상의 낙태에 면죄부를 주는 악법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낙태죄 폐지와 주수 제한을 두고 논의가 길어지는 동안, 임신부의 건강은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낙태죄 대체입법은 단순히 낙태를 처벌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 약물 피임약 허용, 건강보험 적용 등 다양한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 낙태죄 대체입법이 지연될수록 관련 문제에 대한 논의와 입법도 미뤄질 수밖에 없다. 

한편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9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헌재 결정 후 상당 기간이 지났는데 입법이 안 됐고, 미국처럼 세계적 흐름과 다른 결정들이 나오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해 확실한 입법적 조치가 필요하다”며 “국회가 원구성이 되면 이 논의부터 서둘러 하자”고 말했다. 여야가 4일 국회 원구성에 극적으로 합의한 만큼 낙태 보완입법 논의가 진전돼 3년 간의 입법 공백이 해소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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