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연합회가 8일 '가상자산사업자 자금세탁위험 평가방안'을 공개했다. 위는 평가방안 내용 중 일부. 자료=은행연합회
은행연합회가 8일 '가상자산사업자 자금세탁위험 평가방안'을 공개했다. 위는 평가방안 중 '고유위험 평가지표' 관련 내용. 자료=은행연합회

은행연합회가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한 실명확인계좌 발급 심사 기준을 공개했다. 다크코인 상장 여부, 임직원 범죄 전력을 비롯해 고객의 국적까지 고려해 거래소의 위험 등급을 산정할 것으로 알려져, 중소거래소의 실명계좌 발급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 다크코인, 횡령·사기 이력 검증해 코인거래소 위험등급 산정

은행연합회는 지난 4월 은행이 가상자산사업자 관련 자금세탁위험을 식별·분석·평가하는 기준을 마련할 때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배포한 ‘가상자산사업자 자금세탁위험 평가방안’을 8일 공개했다.

평가방안에는 ▲필수요건 점검 ▲고유위험 평가 ▲통제위험 평가 ▲위험등급 산정 ▲거래여부 결정 등 위험평가 업무의 다섯 단계에서 참고 가능한 평가지표 및 방법이 담겨 있다.

평가방안에는 기존에 거론됐던 내용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 필수요건 점검 단계에서는 정보보호 관리체계(ISMS) 인증, 외부 해킹 발생이력, 신용등급 뿐만 아니라 다크코인 취급 여부, 대표자 및 임직원의 횡령·사기 연루 이력도 점검한다. 

고유위험 평가 단계에서는 신용도가 낮은 가상자산을 취급하거나, 취급하고 있는 가상자산의 종류가 많을수록 위험 등급이 높아지게 된다. 최근 코인거래소들이 ‘잡코인’을 무더기 상장폐지하거나 유의종목으로 지정하고 있는 것 또한 이러한 기준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평가기준에 따르면, 고위험 국적고객의 수가 많거나 이들의 거래량이 많을수록 해당 코인거래소의 위험이 가중되는 것으로 판단한다. 고위험 업종 고객의 수가 많아도 위험등급이 나빠지지만, 일부 언론에서 제기한 “정치인 고객이 많으면 실명계좌를 발급받기 어렵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 

은행연합회는 “정치인은 법률가․회계사 등과 함께 4단계 분류 중 3번째 등급으로 분류 예시되어 있어 다른 직업군에 비해 자금세탁 위험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등급으로 분류되고 있다”며 “(고위험업종 고객 관련 평가지표는) 100여 가지 위험평가지표 중 하나에 불과하여 실명계정 발급 자체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통제위험 평가 단계에서는 자금세탁방지(AML) 내부통제 관련 항목들을 평가한다. AML 관련 규정 마련 및 전문인력 배치, 정기적 교육 시행, 워치리스트 필터링(Watch List Filtering, 요주의 인물·기관 대사기능) 여부뿐만 아니라 직원의 신원확인·검증까지 점검하게 된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5월 7일 발의한 '가상자산업법안' 내용 중 일부. 코인거래소에 대한 인가제 도입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자료=국회의안정보시스템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5월 7일 발의한 '가상자산업법안' 내용 중 일부. 코인거래소에 대한 인가제 도입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자료=국회의안정보시스템

◇ 까다로운 은행의 코인거래소 심사

은행연합회가 공개한 평가방안은 안전성이 불확실한 ‘잡코인’의 거래 여부나 사업자의 범죄 이력 등을 포함해 기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고객의 국적 및 업종, 직원의 신원 검증까지 위험평가에 반영돼, 심사 과정은 예상보다 더욱 까다로울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은행권의 심사 기준이 투명하게 공개됐음에도, 규모가 큰 4대 거래소(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를 제외한 중소거래소의 실명계좌 발급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시중은행들 또한 코인거래소에서 발생한 금융사고와 관련해 연대책임을 질 수 있기 때문에 실명계좌 발급에 여전히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신규 고객 확보라는 ‘당근’이 있지만, 사모펀드 사태로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암호화폐 관련 리스크까지 짊어지기에는 부담스럽다는 것. 

일각에서는 금융당국이 코인거래소를 직접 심사해 영업허가를 내주는 인가제로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개정 특정금융정보법(이하 특금법)은 가상자산사업자에게 실명확인계좌, ISMS 인증 등의 요건을 갖춰 신고한 후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경우 은행이 먼저 거래소를 심사해 실명계좌 발급 여부를 결정한 뒤, 실명계좌를 발급받은 거래소가 금융당국에 신고하고, 금융당국이 신고요건을 검토하는 순서로 절차가 진행된다.

하지만 은행권이 코인거래소 심사에 부담을 느끼면서 거래소의 사업 지속 가능성이 불투명해지자 신고제가 아닌 인가제로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금융당국이 먼저 거래소를 심사한 뒤 인가를 내주고, 인가를 받은 거래소에 대해 은행이 실명계좌를 발급하는 방식으로 순서를 바꾸자는 것.

실제 홍콩, 싱가포르, 일본 등은 코인거래소에 대해 인가제를 적용하고 있다. 홍콩의 경우 지난해 11월부터 홍콩 증권선물위원회(SFC)의 허가를 받지 않은 거래소는 영업을 계속할 수 없도록 제도를 변경했다.

일본의 경우, 암호화폐 시장 규제는 민간기관인 일본가상화폐거래소협회(JVCEA)에 맡기고 있지만, 거래소 심사 및 인가는 금융청이 담당한다. JVCEA는 금융청의 인가를 받은 거래소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국회에도 관련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5월 발의한 ‘가상자산업법안’에는 가상자산거래업자에게 금융위원회의 인가를 받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병욱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가상자산업 발전 및 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안’은 가상자산거래업자 및 보관관리업자는 금융위원회에 등록 절차를 마친 뒤 사업을 운영하도록 했다. 현행 특금법의 신고제 보다 규제 강도가 높은 인가제와 등록제를 제안한 셈이다. 

다만 인가제가 적용되고 정부의 개입 강도가 높아질 경우, 암호화폐 시장이 제도권이 진입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져 자칫 시장에 다시 거품이 낄 가능성도 있다. 또한 금융당국이 직접 심사를 맡아도 은행의 부담이 줄어들 뿐, 심사 기준은 더욱 까다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중소거래소에 대한 진입 장벽이 오히려 더 높아질 수도 있다. 

한편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지난 1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코인거래소의 금융사고에 대한 은행의 책임을 면해달라는 요구에 대해 “자금세탁의 1차 책임은 은행에 있다”며 “그 정도도 할 수 없으면 은행 업무를 하면 안된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

특금법 유예기간 종료가 약 2개월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발등에 불이 떨어진 코인거래소들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될지 관심이 집중된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