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주민들이 11일 오후 서울 강북구 한 아파트 경비실 앞에서 숨진 경비원을 추모하고 있다. 숨진 경비원 최씨는 지난달 21과 27일 입주민으로 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취지의 고소장을 접수했고, 지난 10일 오전 자신의 자택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뉴시스
아파트 주민들이 11일 오후 서울 강북구 한 아파트 경비실 앞에서 숨진 경비원을 추모하고 있다. 숨진 경비원 최씨는 지난달 21과 27일 입주민으로 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취지의 고소장을 접수했고, 지난 10일 오전 자신의 자택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뉴시스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아저씨.”

지난 11일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단지 경비초소에 마련된 임시분향소에는 주민들의 마음이 적힌 쪽지가 벽면을 가득 메웠다. 크고 작은 쪽지들에는 전날 한 아파트 주민의 폭행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비노동자 최희석씨를 추모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한 주민은 최씨가 항상 친절했던 사람이라고 추억하며, 고인을 지켜주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는 마음을 쪽지로 남겼다. 

경비노동자와 아파트 주민 간의 갈등은 흔한 일이지만, 이번 사태는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된 갈등이 극단적인 사태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최씨는 아파트 주민이 이중주차한 차량을 옮기다 해당 주민과 시비가 붙어 폭행과 위협을 당하던 끝에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 서울시 4개구 경비노동자 85%가 2차 간접고용

경비노동자 처우 문제는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지난 2014년에도 서울 강남구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노동자로 일하던 이만수씨가 주민 갑질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극단적인 사태가 반복되면서 경비노동자와 시민단체뿐만 아니라 다수의 아파트 주민들까지 나서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일부 주민의 과도한 갑질이 사태의 핵심이라면 처벌 강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겠지만, 경비노동자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경비노동자가 주민 갑질에 취약한 이유는 ‘고용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아파트단지의 경비원과 미화원은 대표적인 간접노용 비정규직 노동자다. 국토교통부에서 발표하는 공동주택현황(2013년)에 따르면, 의무관리대상 아파트단지 수는 전국적으로 분양이 1만2402개, 임대가 1215개 단지다. 이중 위탁관리 단지 비율은 분양이 74.6%, 임대가 72.4%다. 

이 중에서도 위탁관리회사가 다시 용역회사에 경비업무를 재하도급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경비노동자가 2차 간접고용 상태에 놓여있다. 서울노동권익센터가 지난해 강서구, 노원구, 서대문구, 성북구 등 서울시 내 4개 자치구 경비노동자 49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직접 고용된 경우는 겨우 6.5%, 위탁관리회사가 고용한 경우는 7.7%에 불과했다. 반면, 경비용역회사에 고용된 경우(2차 간접고용)는 무려 85.8%로, 전국 평균(65.2%)보다 20%p 가량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 같은 불안정한 고용 상태는 경비노동자가 소위 ‘갑질’을 당해도 항변할 권리를 제약하고, 사태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드는 문제를 초래한다. 특히 아파트 단지의 경우 입주민 전체가 사용자의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다른 직장과는 달리 아파트 경비노동자들은 업무시간 동안 입주민 전체라는 수많은 사용자의 요구에 응해야 하지만, 정작 ‘갑질’ 사태가 발생하면 책임은 특정 입주민도, 위탁회사도, 용역회사도 부담하지 않는다.

서울노동권익센터는 “사용자로서 권한과 함께 책임까지 부담해야 하는데 권리의식은 있지만 책임은 회피하기 쉬운 것이 다수 사용자 집단이 갖는 특성”이라며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닌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시 내 4개구 경비노동자 고용 현황(2019년). 자료=서울노동권익센터
서울시 내 4개구 경비노동자 고용 현황(2019년). 자료=서울노동권익센터

◇ 경비노동자, 고용 안정 위한 법적 장치 필요

주민 갑질과 모호한 업무 범위, 이름뿐인 휴게시간과 저임금 등 경비노동자가 처한 문제의 뿌리에는, 잘못된 처우에도 제대로 항변하고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만드는 ‘불안정한 고용’이 놓여있다. 따라서, 비극적인 사태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고용을 안정화하고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법적 장치가 필수적이다. 

가장 시급한 조치는 입주자 또는 입주자대표회의의 '사용자성'에 대한 명확한 법적 기준을 정립하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들어 입주자대표회의와 경비노동자 간의 묵시적 근로관계를 인정하는 판례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입주자대표회의의 '사용자성'을 인정할 수 있는 법적 기준이 모호해, 해고되거나 부당한 대우를 당한 경비노동자들이 입주자대표회의의 책임을 입증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부당한 업무 지시, 폭언, 폭행 등 갑질을 막기 위한 장치도 부실하다. 공동주택관리법 65조 6항은 입주자대표회의 및 관리주체에 대해 ▲적정 보수 지급 ▲근로자 처우 개선 및 인권 존중 ▲업무 외 부당지시 등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어, 해당 규정은 여전히 ‘권고’ 수준에 그치고 있다. 

부실한 관련법을 개정하는 것이 외에도, 지자체에서 직접 조례를 제정하고 적극적으로 경비노동자 처우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실제 일부 지자체에서는 자체적으로 조례를 제정해 경비노동자 보호에 나서고 있다. 광주광역시, 부산 기장군, 충남 아산시, 전남 여수시, 전북 전주시 등 5곳은 조례를 통해 고령 경비노동자의 고용유지 및 인권·복지 증진을 지자체장의 책무로 규정하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을 경비노동자에게도 확대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해 1월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포함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은 적용 대상이 사용자와 근로자로 한정돼있어, 입주민과 같이 실질적 사용지 지위에 있는 경우는 제외돼있다.

서울노동권익센터는 “근로기준법 상의 ‘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 조항이 도급에 의한 사업의 경우 도급인이나 공동사용자의 지위에 있는 공동주택 입주민에게도 확대 적용될 수 있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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