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평화기념관 내부의 부조


9시 개관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도 4·3평화공원은 북적였다. 주말을 맞아 단체로 체험학습을 하러 온 청소년들이 마치 큰집 제삿날에 만난 사촌들처럼 웃고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인 낭패감과 짜증이 밀려와 한 마디 하고 싶었다.


‘이놈들 좀 조용히 하자. 여기에 소풍 온 것도 아니고....’

그러나 입을 다물었다. 시원하고 조용한 곳을 바란다면 차라리 숲속으로 가든 카페를 가면 될 것을, 나는 왜 자꾸 엉뚱한 데 와서 ‘꼰대’ 같이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나?

사실 오전부터 섭씨 30도 가까이 오르는 땡볕 더위와 정확히 까닭을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어디 조용한 곳으로 피하고 싶어서 선택한 곳이 4·3평화공원이었다. 추모공원이니 시끄러울 리도 없고 냉방까지 잘 되니 이보다 좋은 데가 없다 싶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훼방꾼들을 만난 것이다.

누구든 무리에 들어가는 순간 없던 용기와 뻔뻔스러움이 자신감으로 포장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참기로 했다. 특히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청소년들에게 하는 훈계는 자칫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확률이 높다는 걸 알고 있다.

아이들에게 경건하고 엄숙하기를 포기한 채 여섯 개 기념관을 대충 돌고 다랑쉬굴을 재현해 놓은 특별 전시실에 도착했을 때 아주 진지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서있는 녀석들을 만났다. 아까 홀에서 떠들던 녀석들이다. 홀에서 그렇게 소란스럽던 녀석들이 갑자기 말이 없어진 게 수상해서 가만히 보니 저희들끼리 뭔가 속삭이고 있다.

녀석들은 ‘사진을 찍어도 되나, 저거 진짜 뼈인가, 진짜 똑같이 만들었다, 굴 입구가 어디냐, 끔찍하다, 다랑쉬라는 데가 어디냐, 저거 등잔 봐라...’ 이런 얘기들을 소곤소곤 주고받고 있었다.

-야, 작게 얘기해.

녀석들 중 하나가 내 몸짓에서 터져나오는 불만을 읽었나 보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다들 거기에 서. 그리고 핸드폰 이리 줘, 내가 단체사진 찍어줄게.

녀석들은 “고맙습니다”를 크게 외치더니 재빨리 포즈를 잡았다. 사진 두어 장 찍어주면서 급격히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저기에 11명이라고 적혀 있지만 원래는 열아홉 명이었어. 그 중에는 열 살도 안 된 어린이가 세 명 있었고. 여덟 명은 굴 바깥과 부근에서 총살당했고, 열한 명은 굴 속에 있다가 토벌대들이 수류탄을 던지며 나오라고 하는데도 무서워서 안 나오니까 입구에 불을 피워서 질식시켜 죽인 거야. 굴의 길이가 30미터 정도 되는데, 그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숨이 막혀 죽어간 거야. 저기 안쪽에 한 명이 보이지. 거기가 부엌인데 거기까지 기어가다가 죽었나봐. 자 봐. 원래 출입구가 두 군데야. 그런데 양쪽 모두 막아놓고 불을 지펴버린 거야.

벽에 붙어있는 설명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마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의 증언이라도 듣는 듯 녀석들의 태도는 사뭇 진지해졌다. 나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반듯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여서 ‘오름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다랑쉬오름 옆에 다랑쉬라는 평화로운 마을이 있었어. 불행하게도 4·3의 광풍은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어.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으려고 종달리와 하도리 주민 11명은 허리를 잔뜩 구부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동굴로 숨어들었지. 하지만 피에 굶주린 악귀인 양 군경 토벌대는 눈에 핏줄을 세운 채 동굴을 찾아내고 두 군데 입구에 불을 지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연기로 질식시켜 죽여버린 거야. 43년이 지난 1991년 12월에 발굴되고 이듬해 4월에 공개되었지만 5월 15일 억울한 영혼들은 한 줌의 재로 김녕리 앞바다에 서둘려 뿌려졌어. 시신들이 누워 있던 동굴 역시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동굴 입구를 커다란 돌로 틀어막고 흙으로 덮어 버렸어. 동굴 속에는 수습하다 남은 유골조각과 그들이 사용했을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이렇게 해서 10가구 40여 명이 오순도순 살던 아주 작은 마을은 어느 날 지도상에서 사라졌어. 잃어버린 마을이 된 것이지.
 

다랑쉬굴 내부의 시신 발굴 현장


-거기에 그럼 아무도 안 살면 지금은 어떻게 됐어요?

-일부는 누군가가 밭농사를 짓고 있고 굴이 있는 자리는 방치된 상태로 잡초가 우거져 있어.

-그럼 지금도 다랑쉬굴에 호미와 쇠스랑, 곡괭이, 무쇠솥, 항아리, 등잔 같은 것들이 남아 있다는 건가요?

-응. 들어가보질 못해서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뼈만 수습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놔뒀대.

-그런데 유족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몰랐을까요?

-당시만 해도 유족들은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입을 다물고 살아야 했어. 한동안 4·3 때 죽은 사람을 빨갱이로 취급한 적이 있어. 그러다 보니 굴 속에 자기네 식구들이 죽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40년이 되도록 시신을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했어.

-굴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정말 빨갱이들이었어요?

-아니지. 거기에는 경찰의 일을 도와주던 네 명의 젊은이도 있었어. 그런데도 그냥 무서우니까 굴 속에 피신해 있었던 거야. 그걸 군경 토벌대는 마구잡이로 죽인 거고. 그러니까 빨갱이니 좌익이니 하는 이념과는 관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거야.
 

다랑쉬굴 안내표지 / 다랑쉬굴 입구


-그런데 굴 입구는 왜 막아버렸대요? 그냥 놔두고 역사교육현장으로 활용하면 좋지 않을까요?

-맞아. 그런데 참혹한 현장을 빨리 덮어버리고 싶었겠지.

-아무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렇겠지. 세상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지. 비정상적인 것이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전시실을 나온 아이들은 준비되어 있는 노란 메모지에 방문 소감을 적는다.

진지한 표정으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적는 모습이 예뻐 보여 시원한 음료수를 사기로 했다.

-뭐라고 적었어?

-비밀.

-비밀은 뭐, 내가 가서 보면 되는데.

-가서 보든지...

-그런데 너는 4·3이 왜 일어났는지 이해가 되니? 나는 봤는데도 모르겠어.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1947년 3·1절 기념행사 때 경찰이 시민한테 총을 쏜 것도 이해가 되지 않고, 1948년 4월 3일 새벽에 무장대가 파출소 습격하는 바람에 일어났다고 하는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아.

-나도 그래. 난 다랑쉬굴만 생각이 나.

아이들의 이야기가 공감이 간다.

-그래, 그럼 내가 간략하게 정리해 줄게. 4·3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 사회를 알아야겠지.

다들 알다시피 1945년 해방이 되자 해외에 나가있던 많은 제주도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어. 6만 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 때 제주도민 전체가 25만에서 30만 명 정도로 추산돼. 갑자기 사람들이 늘어나니까 먹고 사는 일이 더 힘들어졌겠지. 거기다가 노무동원과 공출로 여전히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지. 노무동원은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해서 일을 시키는 것이고 공출은 국민으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강제적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해. 그래도 도민들은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야학과 학교를 세우고 새 나라 건설의 희망을 품고 지냈어. 그런데 1946년 대흉년에 미군정이 미곡수집령을 내려. 백성들로부터 곡식을 거둬들인다는 거야. 거기다가 친일경찰까지 다시 등용했으니 도민들의 불만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어. 그러니까 1947년 3·1 대회는 이런 것들에 대한 항의였던 셈이야. 그 다음은 너희들이 알다시피 지금의 관덕정 부근에서 3·1시위 도중에 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다치는 일이 발생해. 여기에 항의를 하니까 육지에서 온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쏴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해. 그런데도 미군정 경찰은 잘못을 시위자들한테 돌려버린 채 시위자 검거에 나선 거야. 그러자 3월 10일에 학교와 관공서, 상점 등 민관 모두가 총파업에 들어갔어. 제주도민과 시위자들은 탄압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면서 아울러 남한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결사반대한다고 성명을 냈어. 이 무렵에 미군정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5·10총선거를 추진중이었거든. 이 때 일제 때 앞잡이노릇을 하던 친일경찰과 서북청년회 등 극우단체들이 나서서 제주도를 공포분위기에 몰아넣기 시작했어. 결국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3개의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무산되는 일이 생겼지.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레드 아일랜드 RED ISLAND)으로 규정하고 탄압을 하기 시작했고,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피신을 했어. 이들을 무장대라고 부르는 남로당원과 입산자들이야. 그리고 무장대를 진압하는 측의 사람들을 토벌대라고 불렀어.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이지. 그러니까 무장대 대부분은 이념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탄압을 피해 산으로 간 사람들이야. 사실은 토벌대도 마찬가지야. 친일경찰은 자신들의 과거를 지우려고 악랄한 짓을 했고, 나머지 군경과 서청도 꼭두각시가 많았어.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미국은 우리를 일본으로부터 해방시켰고 우리나라에 원조도 많이 한 나라인데 왜 미국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물론 미국은 고마운 나라야.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미군정에 지배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까 얘기했듯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제주도민에게 덮어씌우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거지.

학교 동아리에서 단체로 체험활동을 하러 왔다는 중학교 2학년생 친구들이 현재의 정치, 교육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만으로 과거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의식이 성장해 가면서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덩달아 성장해 갈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그들의 의식이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나의 과거이고 나는 그들의 미래이기에 그들과 나는 결코 남남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아이들이야말로 역사의 동굴 속에 갇혀 있는 4·3의 영령들을 밖으로 끌어낼 구원의 손길을 건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표정을 통해 그들은 강요된 엄숙함에 눌려 짐짓 경건한 척 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안도감과 같은 감정에 대해 솔직하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상처마저도 한 순간에 치유해 낼 수 있는 그들만의 특별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고.

며칠이 지난 후 문자가 와 있기에 열어보니 4·3평화공원에서 만났던 중 2짜리 학생이었다. 다랑쉬마을이 있던 곳과 굴 입구를 찍은 사진을 보내주겠다던 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내용이다.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사진을 보냈다.

-늦어서 미안.

-괜찮아요^^. 그런데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예상치 못한 제의에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다 답문을 보냈다.

-오키. 약속시간을 보내렴. 대신 현기영 선생님의 <순이삼촌>을 꼭 읽어오기로 하자.

우연히 만난 어린 친구들과의 2차 약속은 그렇게 해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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