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WHO 게임이용 장애 질병코드화’에 대해 토론했다.

21일 서울 강남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엔스페이스에서 열린 이번 토론회는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와 인터넷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NGO 사단법인 ‘오픈넷’이 공동 주최했다.

이 자리에는 박경신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태원 경일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 이상욱 한양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학진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김호경 서원대학교 문화기술산업학과 교수, 이경화 학부모정보감시단 대표가 참석했다.

황성기 오픈넷 이사장 겸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 의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 사진 = 김윤진 기자

황성기 오픈넷 이사장 겸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 의장은 개회사에서 “영화, 웹툰, 음악 등을 질병으로 지정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에 우리는 게임이용 장애의 질병코드 등재가 문화와 표현의 자유 관점에서 매우 심각한 일이라는 점에 인식을 공유했다”며 “오늘 토론회는 게임산업 진흥과 건전한 게임문화 확립을 위한 자리”라고 말했다.

먼저 ‘표현의 자유의 관점에서 본 WHO 게임이용 장애 질병코드화의 문제’라는 주제로 발제한 박경신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게임개발자의 ‘표현’은 현행 법리상 ‘표현의 자유’로 보호된다. 하지만 게임 이용자들의 ‘알 권리’는 게임 셧다운제 합헌 결정으로 알 수 있듯 보호되지 않는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 다뤄지는 게임을 물리적 본질을 가진 마약, 도박, 알코올과 동일한 의학적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헌적인 규제들을 양산하거나 고착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경신 교수는 이어 “실제로 공부, 만화, TV, 일 중독 등 수많은 몰입행위들 가운데 게임중독에만 질병코드를 부여할 정당성이 있는가"라며 "유독 게임중독에 대해서만 질병으로 지정하는 의미는 규제강화의 전조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경신 교수는 끝으로 “게임중독이 다른 몰입행위보다 더 강한 생활파괴를 일으키는가에 대한 근거가 필요하다. 특히 게임이 가지는 긍정적인 효과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 발제자로 나선 오태원 경일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규범조화의 관점에서 본 WHO 게임이용 장애 질병코드화의 문제’라는 주제로 “정보사회에서 게임에는 ‘법’, ‘시장원리’, ‘사회규범’, ‘코드’라는 네 가지 규범 작동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오태원 교수는 법의 관점에서는 “현재 한국에서 개발되고 한국에서 서비스되는 게임은 한국의 법을 준수하고 있다. 한국으로 수입된 해외 유명 게임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부 해외 퍼블리셔들이 제공하는 게임들은 한국 법을 준수하지 않고 있음에도, 한국 법을 강제하는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시장원리 관점에서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쾌락’을 느끼기 위해 게임을 한다”며 “만약 게임으로 얻는 쾌락이 투여하는 비용과 시간보다 우월하지 못하다면 게임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규범 관점에선 “특정 게임 내에서는 이용자들 사이에서 불문율로 게임 중간에 접속을 끊는 것을 비매너 플레이로 보거나, ‘GG’를 패배를 인정하는 신호로 보는 등 여러 사례가 있다. 또한 게임 개발자들에게 적용되는 윤리도 있다”며 “게임 개발자들은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자율규제나 건전한 게임습관을 위한 캠페인 등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오태원 교수는 ‘코드’로 만들어지는 게임의 특성도 짚었다. 오태원 교수는 “특정 게임의 아이템 거래가 사회적 문제가 된다면, 이를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고 처벌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게임사들은 프로그램상에서 아이템 거래 기능을 없애 손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태원 교수는 끝으로 “게임이용 장애에서 ‘게임’의 범주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다. 바둑을 예로 들어보자. 바둑은 오프라인으로도, 온라인으로도 즐길 수 있다. 만약 바둑으로 인한 게임이용 장애 증상이 발생했다면, 바둑이 문제인가, 온라인이 문제인가. 또 이는 게임이용 장애인가, 인터넷 과의존인가”라고 의문을 던졌다.

학계 인사들이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 사진 = 김윤진 기자

이어진 토론에 첫 번째로 나선 이상욱 한양대학교 철학과 교수는 WHO의 결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이상욱 교수는 “WHO의 자료들을 읽어보면 이들이 얼마나 이번 결정에 대해 고심했는지 알 수 있다. 게임에 몰입하는 사람들의 증상을 오랜 기간 지켜봐왔다는 반증”이라고 옹호했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게임 이용자들은 WHO가 규정한 ‘게임이용 장애’에 해당하지 않는 점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며 “의사들은 대부분 대증요법을 쓴다. 의학계는 게임이용 장애의 원인이 게임에 있지 않고, 개개인의 환경이나 사회적 요인에 있을 수 있지만, 치료를 통해 완화될 수 있다면 질병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상욱 교수는 WHO의 결정이 게임업계에 대응의 여지를 주지 않은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다는 점은 인정했다. 이상욱 교수는 “WHO는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지정한 이유에 대해 명확히 설명해 게임업계와 대중들을 납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김학진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뇌과학적 관점에서 보상 반응에 주목했다. 김학진 교수는 “게임중독은 ‘인정중독’에 가깝다”며 “다른 플레이어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결과인 사회적인 인정, 보상이 게임에 몰입하게끔 만든다”고 주장했다. 게임개발자들의 기획이 이용자들을 게임중독으로 이끈다는 지적이다.

김학진 교수는 이어 “WHO의 결정을 게임산업이 사회에 미치는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를 찾고자 노력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게임계는 이용자들이 과몰입하도록 게임을 만들진 않았는지 자체 점검하고 방지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의료계는 게임중독에 특별히 취약한 개인적, 상황적 특성들을 발굴해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호경 서원대학교 문화기술산업학과 교수는 게임의 순기능을 강조하며 WHO의 결정에 반대했다. 김호경 교수는 “게임 공간에 자신의 분신을 만듦으로써 현실 공간을 탈출할 수 있었으며, 게임이야말로 자신을 진정으로 도와줬다고 말한 근육위축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있었다. 이처럼 게임은 단순히 재미로만 즐기는 도구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이용자 개인의 삶에 활력을 주는 원동력으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김호경 교수는 “게임의 해악을 명백하게 밝혀내는 객관적인 근거가 뒷받침되고 있지 않음에도 게임을 큰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며 “입시, 쇼핑 등 몰입행위를 보이는 수많은 문제행동 중에서도 유독 게임과몰입만 질병으로 지정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정당성이 논의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경화 학부모정보감시단 대표는 WHO의 결정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이경화 대표는 “NGO 활동을 하며 게임 아이템 사기, 음란성 및 폭력성 등 여러 문제 사례들을 봐왔다”며 “이 문제들은 모두 인터넷과 결합 돼 생긴 ‘인터넷 게임’의 특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경화 대표는 “WHO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부중독, 독서중독, 만화중독 등에 대해선 중독이라고 지적하는 것을 비웃는다. 이것들은 ‘누구의 탓’이라고 할 만큼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임이용 중독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내가 만난 어느 게임을 많이 하는 청소년은 ‘게임은 싸게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문화’라고 말했다. 그래서 ‘원하는 만큼 돈을 주면 게임을 그만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는 WHO의 결정을 계기로 게임이용 자체에 대해 고민해야 함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이경화 대표는 게임업계가 게임의 부정적인 측면을 감추고, 순기능만 내세운다고 질타했다. 이경화 대표는 “게임 사업자들이나 게임 관련 전문가들은 ‘게임은 문화다’라고 외치면서, 정작 제시하는 게임들은 e스포츠 게임이나 아케이드 게임이다. 가장 문제시되는 RPG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한다”며 게임 개발자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RPG를 개발하고 있는지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화 대표는 끝으로 “우리는 WHO의 결정이 만장일치로 통과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게임이용 장애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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